방향 전환 > 담임 목사 칼럼

본문 바로가기
close
menu
Live

담임 목사 칼럼

방향 전환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NCBC웹
조회 1,205회 작성일 22-03-18 22:59

본문

1919년 정월 초하루, 죠지아 공대와 캘리포니아 대학의 로즈볼게임이 있었습니다. 전반전을 마치기 바로 직전에 캘리포니아 대학의 로이 리이겔즈라는 선수가 펌블 공을 되찾았습니다. 잡자마자 최선을 다해 달렸습니다. 점수를 낼 수 있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이제 골 라인을 바로 앞에 두고 있는데 한 선수가 태클을 합니다. 그런데 그 선수는 상대편 선수가 아닌 자기편 선수였습니다. 놀라서 상황을 보니, 자신은 상대편이 아닌 자기팀의 골라인으로 달렸던 것이었습니다. 무려 65야드를.


방향이 틀리면 아무리 빨리, 열심히 달려도 소용이 없습니다. 방향이 틀리면 자신의 열심은 오히려 팀에 손해를 끼칠 수도 있습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인생도 방향이 중요합니다. 인생의 방향이 바로 나의 미래를, 나의 가족의 미래를 그리고 나의 공동체의 미래를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역사에서 바울처럼 중요한 인물은 없을 것입니다. 신약 성경의 27권 중 13권이 그를 통해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복음의 정의와 신학의 기초가 바울을 통해서 세워졌습니다. 그러나 그가 본래 어떠한 사람이었는지 우리는 잘 압니다. 사도행전과 바울서신을 통해 본 그는 기독교를 열심히 박해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다메섹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인생의 뱡향이 달라졌습니다. 십자가를 핍박하던 삶이 십자가를 향해 달려가는 삶으로 방향 전환이 이루어졌습니다.


바울은 원래부터 열심이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무엇을 해도 참으로 열심히 했습니다. 예수를 믿는 자들을 핍박하는 일에도 열심이었습니다. 얼마나 열심이었는지 스데반 집사의 죽음이 잘못되면 그 피값을 담당해야 하는 자리에까지 서스름없이 설 정도였습니다.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행 7장58절


그뿐 만이 아닙니다. 그의 열심은 그를 멀리 다메섹까지 가서 예수를 믿는 자들을 잡아 감옥에 넣거나 죽이기 위해 달려가게 합니다. 그의 열심은 누구에게도 뒤쳐지지 않았습니다.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        행 9장1-2절


바울이 이렇게 까지 한 이유중 하나는 그가 유대 종교에 깊이, 그리고 열심이 있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아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당대 제일 유명한 스승인 가말리엘 밑에서 배워 성경도 잘 알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그래서 그가 믿던 종교를 향한 열심은 누구와도 비교할 수없을 정도로 강했습니다. 문제는 그 열심이 살리는 열심이 아닌 죽이는 열심었다는 것입니다. 그 열심이 자신은 바른 열심이라고 믿었는데, 예수님은 그 열심이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박해하고 있다고 말하신 것입니다.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행 9장3-5절


그러던 그가 다메섹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은 그의 열심이 하나님을 위한 열심이 아닌, 종교적인 열심이었음을 깨닫게 합니다.  그 후 바울은 삶의 방향전환을 이루게 됩니다.


바로 내 열심에서 하나님의 열심으로.


수년전 파키스탄의 소수민족 장관인 샤바즈바티 장관이 테러로 살해당했습니다.. 파키스탄에 있는 신성모독법..즉 알라나 마호멧의 이름을 함부로 사용하면 죽이는 법이 옳지않다 말하다가 살해 당한 것이었습니다. 수년전 터키의 디아르바르크에서도 40대 초반 선교사가 살해당했습니다…그 것도 18살의 소년에 의해..

종교란 이름으로는 모든것이 가능합니다.. 기독교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십자군 전쟁은 십자가를 앞세워 종교한 이름으로 사람을 죽이고 자신들이 원하는 욕심을 채운 역사임을 우리는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 때의 기독교 종교의 만행은 지금도 모슬림 사람들은 기억하고 있을 정도 입니다..

종교는 사람의 열심으로 죽이고, 신앙은 하나님의 열심으로 살립니다.


저가 또 우리로 새 언약의 일군 되기에 만족케 하셨으니 의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고전 3장6절


종교는 사람의 열심으로 가르지만, 신앙은 하나님의 열심이기에 가르지 않습니다.


이는 다름아니라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는 것이니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뇨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뇨     고전 1장12절 


사람의 열심은 바울과 베드로와 아볼로와 예수를 가르고 나눕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열심은 나누어진 것을 하나가 되게합니다. 하나님의 열심의 중심에 바로 십자가가 있기 때문입니다..십자가는 죄로 인해 갈라진 하나님과 사람을 다시 화목하게 합니다. 즉 하나되게 합니다.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엡 2장16절 

아브라함이 이스라엘의 시작이라면 모세는 이스라엘을 있게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있을 것입니다. 그러한 모세가 자기의 즉 사람의 열심으로 이스라엘의 구원을 시작합니다. 그러나 그 열심이 자신을 살인자로 만들고 자신도 도망자로 만듭니다. 사람의 열심은 결국 실패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에게 광야40년을 통해 사람의 열심을 다 내려놓게 하십니다. 얼마나 내려놓게 하셨던지 하나님이 말씀에도 바로 순종을 못하고 질문하고 질문을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지팡이가 뱀이되게하시고 손에 문등병이 들었다 낫게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었음에도 모세는 결국 하나님을 화나게 합니다.

모세가 이르되 오 주여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 여호와께서 모세를 향하여 노하여 이르시되 레위 사람 네 형 아론이 있지 아니하냐 그가 말 잘 하는 것을 내가

아노라 그가 너를 만나러 나오나니 그가 너를 볼 때에 그의 마음에 기쁨이 있을 것이라 출 4장13-14절


성경에 하나님이 사람을 불러 쓰시며 열받게 한 사람은 모세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사람의 열심을 철저하게 내려놓게 하시고 나서야 모세를 사용하십니다. 내 열심이 아닙니다. 사람의 열심은 나누고 가르고 죽이게 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다메섹에서,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만나 삶의 방향 전환을 이룬 것 같이 우리의 삶에도 방향 전환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사람의 열심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없습니다. 오히려 망가지고 망가트리게 됩니다. 하나님의 열심만이 우리를 온전한 신앙의 삶으로 나아가게 할 수있습니다. 바울같이 모세같이 우리도 하나님의 열심으로 방향 전환을 이루어 나누어 진것을 합하고, 죽던 것을 다시 살릴 수있는 우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