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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임 목사 칼럼

“그래서”의 사람들이 아닌 “그러나”의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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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NCBC웹
조회 1,068회 작성일 22-07-02 1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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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는 참으로 무섭습니다. 잠깐 사이에 온 세상이 죄악으로 물들어 가고 있습니다.

그동안 많은 크리스찬들이 동성애를 나와는, 우리와는 상관 없는 것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교회까지 나서 동성애는 문제가 아니라고 하는 세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오히려 이제는 죄를 죄라고 이야기하면 나쁜사람, 속 좁은 사람, 사람을 정죄하는 사람이 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미국 감리교회는 동성애를 반대하는 목사를 면직 시키기까지 했습니다..또한 미국 여권엔 남자도 여자도 아닌 X라는 성이 공식적으로 통용되게 되었습니다


요즘의 뉴스를 보면 ‘세상이 이렇게 악해질수 있는가? 살기가 무섭다’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을 하면서도 우리가 이런 악한 세상에서 올바로 살아가는 것은 정말 힘든 것이라고 자신과 타협을 합니다. ‘이미 동성애가, 이미 세상이 이렇게 흘러가는데 나 혼자 무엇을 할 수 있겠어?’라고 생각하며 세상의 흐름은 내가 어쩔 수 없이 따라야만 하는 대세라고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그런 세상은 지금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창조 후 얼마 지나지도 않아 세상은 죄악으로 덮여 졌습니다. 그 때나 지금이나 이것이 죄의 힘입니다. 얼마나 죄악이 만연했으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심을 한탄했다고 기록할 정도였습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창6장5-7절…


하나님이 하나님의 창조를 한탄한 이유가 하나님의 마음으로 창조된 인간들의 마음의 계획과 생각이 항상 악했기 때문임을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한탄이라고 표현된 단어는 히브리어로 나함이라는 단어인데 “후회하다”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후회가 없으신 하나님이 후회라는 표현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실 정도로 마음이 아프셨다라는 것을 우리에게 알게 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신 것을 한탄하시고 어둠 밖에 보이지 않던 세상에, 다 죄악으로 물들어 하나님의 마음에 후회를 심던 세상에, 그래서 모든 것을 심판 하시겠다고 결정하신 그 세상에 갑자기 등장하는 한 단어가 있습니다.


바로 “그러나” 라는 단어입니다.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창6장8절…


하나님이 한탄 하실정도로 사람들이 타락한 세상에, 그래서 사람에게는 이제 더 이상 아무 소망도 없어 보였을때 여기에  “그러나”가 그리고 그 “그러나”의 사람 노아가 등장 한 것입니다..


이 “그러나”로 인해 인류의 절망이 다시 소망으로 바뀌게 됩니다.


지금도 이러한 “그러나의 사람들”이 중요합니다.


세상이 힘들고 살 수 없어서, 죽음밖에 보이지 않아서, 절망밖에 보이지 않아서… “그래서” 나도 어쩔 수 없어의 사람들이 아니라, 세상이 그렇다고 해도 그것을 거슬러 살아가는 사람들이 바로 “그러나의 사람들” 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바로 이런 “그러나”의 인생을 산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 왔습니다..


요셉은 형제들의 배신으로 자신이 노예로 팔렸어도 “그러나”였습니다. 감옥에 억울하게 갇혔어도 그는 “그러나” 였습니다. 절대 그 말씀의 끝은 ‘그래서 그가 좌절했더라, 마음에 미움을 간직했더라’가 아니였다는 사실입니다.


다니엘은 예루살렘을 향해 기도를 드리면 죽는 것을 알면서도 “그러나” 였습니다. 아니 더 나아가 창문을 열고 세상 앞에 보란듯이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를 들어 세상에서 높임을 받으셨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는 우상에 절하지 않으면 불에 타 죽는 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러나” 였습니다. 그들이 외친 이 “그러나”의 외침은 지금도 우리의 마음에 도전과 감동을 줍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왕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단3장16-18절..


스데반은 복음을 선포하면 죽을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러나” 였습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잡혀서 죽는 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도 역시 “그러나” 였습니다. 이러한 “그러나”의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의 역사를 이 땅에 이루어 왔습니다.


세상은 분명 더 더욱 죄로 물들어 갈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더 더욱 우리의 희생과 결단이 없이는 힘들고 어려워 질 것입니다. 그러기에 더 이 시대에 “그러나”의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세상의 어려움을 핑계대고, 세상의 흐름을 핑계대는 “그래서”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닌, 아무리 힘들고 아무리 어려워도 세상을 거슬러 올라가는 “그러나”의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성경은 이런 “그러나”의 크리스찬들을 통해 이루어진 역사의 기록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고백하는 우리가 “그래서”의 사람이 아닌 노아처럼, 요셉처럼, 스데반처럼, 바울처럼 “그러나”의 사람으로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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