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로스 6기 평신도설교- 믿는자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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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3,826회 작성일 19-03-04 08:53
본문
본문말씀 : 룻기 1:6~18
제목 : 롯의 선택 박지윤 자매님
성경 본문을 보면 유대인이지만 모압지방에 살던 나오미는 남편과 두 아들을 모두 잃게 되자 살 길이 막막해 하던 중에 고향 유다지방에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 함을 듣게 됩니다. 그래서 가족 중에 남은 그 두 며느리와 함께 유다 지방으로 돌아가려고 마음을 먹게 됩니다.
이렇게 함께 유다지방으로 가려다가 나오미가 모압인인 두 며느리들에게 각자의 친정으로 돌아가 재혼하여 새로운 남편의 위로를 받으면서 살라고 설득하면서 두 며느리를 각자의 친정으로 돌려보내고 본인만 홀로 자신의 고향인 유다지방으로 돌아가려고 하고 있습니다.
아마 나오미는 두 며느리를 자신이 데리고 유다지방으로 가는 것이 그들에게 못할 짓이라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설득하는 말을 보면 자신의 태중에 너희 남편될 아들이 없고 늙어서 더 이상 남편을 두어 아들을 낳기도 어렵고, 설령 남편을 두어 아들을 낳는다 하더라도 그가 자라서 두 며느리의 남편이 되기까지 기다리기에는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리므로 너희가 남편없이 살겠다고 결심하는 것과 같다고 말하면서 두 며느리를 돌려보내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에는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한 규례대로 죽은 형제에 대한 의무를 지켜 죽은 자의 아내는 타인에게 시집 가지 말고 남편의 형제와 결혼하여 낳은 첫아이는 죽은 형제의 대를 잇게 하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아니 풍습이라기 보다는 이것이 곧 유대인의 율법의 규례였습니다(신 25:5).
하지만 규례대로 행한다면 앞으로 자신을 따라 오게 되면은 혼자 살 것이 너무나 뻔히 보이는 두 며느리를 나오미는 측은히 여겨 두 며느리에게 새로 남편을 맞아 편안히 살 것을 권유했던 것입니다. 자신도 늙어 며느리의 수발이 필요했을 텐데 젊은 며느리의 앞날을 생각하면서 돌려보내려고 했던 것은 나오미의 며느리들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자 여기서 두 며느리의 서로 다른 선택이 보여집니다. 물론 이러한 시어머니의 권유를 들은 두 며느리는 처음에는 둘 모두 시어머니인 나오미를 따르겠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나오미가 자신을 따라 함께 가게 되면 나오미에게는 더 이상의 아들이 없고 앞으로도 설령 낳게 되더라도 그가 장성할 때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므로 두 며느리가 모두 남편없이 지내게 될 것이라고 말하면서 여호와께서 나오미 본인을 치셨기 때문에 더 이상의 희망이 없어 더 마음이 아프다고 좀 더 현실적으로 상황을 설명하니 첫째 며느리인 오르바는 울면서 시어머니와 작별을 하고 돌아가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현실적인 생각을 하니 앞으로의 앞날이 너무 캄캄하게 느껴졌을것입니다. 시어머니를 따라 가는 것에 희망이 보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오르바가 시어머니를 좋아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정말 시어머니를 사랑하였지만 오르바는 시어머니보다는 자신을 더 사랑하는 마음이 컸기에 평생 남편없이 자식을 낳지도 못하면서 힘들게 고생만 하고 한 평생을 마감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니 자신의 인생이 너무 처량하게 느껴져서 시어머니가 권할 때 떠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하고 눈물로 작별을 고하고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선택을 하게 된 것 같습니다.
반면 둘째 며느리인 룻은 어머니를 떠나고 어머니를 따르지 말라 강권하지 말라고 부탁하면서 어디든 어머니가 가는 곳, 머무는 곳에 함께 할 것이고,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고 어머니가 죽는 곳에서 자신도 죽겠노라 이야기 하면서 만약에 죽음이 아닌 다른 이유로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벌을 내리시는 것도 받겠노라고 하면서 어머니를 따르겠다는 강한 의지를 나오미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룻의 고백을 보면 정말로 대단합니다. 일단 룻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보다 시어머니를 사랑하는 마음이 더 컸던 것 같아 보입니다. 그러기에 어머니 가는 곳 어디라도 따라가고 어머니 머무는 곳 어디라도 머무를 것이고 어머니 죽는 곳에서 자신도 묻힐 것이라는 고백을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될 것이라 고백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이 이미 변화되었다는 것을 확정하는 고백을 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신다는 신앙 고백까지 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맞춘 정체성의 확실한 전환과 신앙고백을 하는 모습을 보니 룻의 가장 우선순위는 자기 자신이 아닌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이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을 볼수 있습니다.
이미 나오미의 삶이 자신의 삶이 되어버렸기에 나오미를 떠나지 않고 끝까지 동행하여 유다지방까지 함께 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시어머니의 생각이 룻의 생각이 되고, 시어머니의 백성이 룻의 백성이 되고 시어머니의 하나님이 룻의 하나님이 되어 죽는 날까지 시어머니와 동행하였던 룻처럼 예수님의 생각이 나의 생각이 되고, 예수님의 교회와 백성이 나의 교회와 백성이 되며,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을 섬기면서 예수님과 죽는 날까지 동행하는 삶, 예수님을 나의 가장 사랑하는, 나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하는 모습이 우리의 삶 가운데에도 있어야 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사실 우리의 선택은 룻이 아닌 오르바와 같은 선택을 할 때가 많은 것 같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아서 오르바와 같은 선택을 하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내가 처한 현실적 상황을 생각하거나 나를 사랑하는 마음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보다 더 클 때 오르바와 같은 선택을 더 많이 하게 됩니다.
하지만 룻의 선택의 배경은 오르바와 다소 차이가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녀의 삶의 태도에서 보여주는 것은 단순한 책임감은 아니었습니다. 현실적으로 보면 조금 어리석은 사람으로 보여질 수도 있습니다. 물론 룻이 자신이 다윗의 증조할머니가 되고 예수님의 족보에 등장하게 될 것을 미리 알고 이러한 선택을 한 것도 아닙니다.
당시 과부로 사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 알고 있다면 단순한 책임감만으로 이런 결정을 하고 시어머니를 따르기는 쉽지 않고 오히려 오르바처럼 결정하는 것이 보통 사람의 선택일 것입니다. 하지만 룻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기보다 시어머니를 더 사랑했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룻의 가장 우선순위는 자기 자신에게 있지 아니하고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시어머니에게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했기에 시어머니의 것을 모두 자기의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얼마나 예수님의 것을 나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살고 있는지, 정말 나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하기는 하는지, 진짜 예수님을 사랑하기에 나의 정체성이 사랑하는 예수님의 것으로 완전히 바뀌어 있는지, 그래서 항상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처음에 룻을 볼 때 이상하고 어리석은 선택을 한다고 느낀 것처럼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바라볼 때 이상하고 어리석은 선택을 하는 사람이라고 느낄 정도로 예수님과 딱 붙어사는 모습을 보여야 할 것입니다. 떨어지라고 해도 안 떨어지는 찰거머리처럼, 세상 판단으로는 도저히 바보같은 선택이어도 예수님과 붙어있기만 할 수 있다면 그 바보같은 선택을 하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모압 여인이었던 룻이 예수님의 족보에 등장하게 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룻에게는 사랑하는 사람에게로의 완전한 정체성의 전환이 있었고, 그 사랑하는 사람과의 완벽한 동행이 있었기에 예수님의 족보에 이방 여자였지만 이름이 오르는 영광을 누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룻과 같이 자신을 사랑하기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하고 우리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선택하기보다 예수님이 좋아하는 일을 하고 선택하는 우리 모두가 되길 바랍니다. 그래서 천국 시민이라는 확고한 정체성을 갖고 주님 만나는 날까지 예수님과 동행하는, 한 발자국도 예수님 곁에서 떨어지지 않는 우리의 삶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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