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로스 6기 금요일 저녁반 독후감 - 래디컬 (김대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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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4,007회 작성일 19-04-19 1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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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디컬을 읽고, 이러이러하게 무난하게 독후감을 써야겠다고 생각했지만, 무언가 마음이 불편해서 다른 방향으로 쓰다보니 두서없는 독후감이 될 것 같습니다. 읽을 책으로 무엇을 할까 고를 새도 없이 래디컬(radical)이라는 무서운 이름을 가진 책이 그냥 집에 있었습니다. 처음에 예상했던 것과는 다르게 술술 읽혀지고, 무엇보다 별로 래디컬하게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정말 래디컬한 선교사님들의 이야기 몇 가지를 예로 든 것을 제외하고는 성도들에게 요구하는 것이 이미 그리스도인인 이들에게는 래디컬할지언정 성경 내용을 좀 아는 비기독교인들에게는 으레 기독교인이 그 정도는 해야 하는 게 아닌가 라고 보일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읽으면서 제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기독교를 바라보던 시각이 다시 생각나고 그 때 가졌던 여러가지 의문들이 다시 떠올랐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저는 하루에 라면 하나랑 공부할 거리 하나정도만 있으면 아무 걱정거리도 없고 특별히 원하는 것 조차 없는, 만족한 삶을 사는 geeks였습니다. 무언가를 열심히 하는 건 몸에 베여 있고, 사람에 대한 관심은 없고, 아무 걱정도 없으니 그야말로 전도하기 제일 어려운 타입 중의 하나였습니다. 아마 아내를 통해서 예수님을 만나지 않았으면 저는 평생 왠지 허무한 게 있기는 하지만 뭔지는 모른 채 큰 걱정없이 살다 죽어 지옥갔을 겁니다. 그 당시에 기독교에 대해 많은 의문들이 있었습니다. '전지자께서 다 계획하신 후에 후회하고 눈물을 흘리는 게 가능한가'. '그렇다면 전지는 단순히 인간보다 많이 안다는 것인가 아니면 진짜 다 안다는 것인가' 등등 문자적인 것부터 시작해서 '저 그리스도인들은 왜 저렇게 확신에 차서 성경에서 하라는 건 안 하나''까지 다양했지요. 당시에 친구들이 리처드 도킨슨 책에 매료되어 있었고, 기독교인들을 상대하는 방법을 연구하고 있을 즈음, 하나님 은혜로 저는 그렇게까지 반기독교적이 되지는 않았고, 교회 문턱을 넘어 들어오는 것에도 아무 부담이 없었지만 여전히 비슷한 의문이 남았습니다. 그걸 교회에 오자마자 다 해결하려들면 그대로 나가게 될 것 같아서 묻어두고 묻어 두다가 다시 성경공부 자리로 왔습니다.
아직까지의 결론은 이렇습니다. 나도 그렇고 다들 병자만 다 와 있구나. 그리고 인간은 어쩔 수가 없고, 인간 인식의 한계는 역시나 명확하구나.
이건 제가 좋아하는 그림입니다. 볼 때마다 하나님을 보는 사람들의 모습을 생각하게 합니다. Tensorflow라는 요즘 인공지능이나 딥러닝 연구자들이 사람들이 자주 쓰는 프로그래밍 툴의 옛날 로고입니다. 하나의 3차원 입체를 놓고 빛의 비추는 방향에 따라 그림자가 [T]ensor[F]low 로고의 T와 F가 되는 것이지요. 데이터 과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고차원데이터를 바로 이해하지 못해서 딱 이해할만한 수준의 차원 (2차원이나 3차원)으로 데이터를 투영(projection)해서 그림자를 만들고 그 특징을 살펴봅니다. 로고를 디자인한 사람이 의도한 것인지 모르겠으나 저에게는 저게 하나의 진리를 놓고 보는 방향에 따라 참(T)과 거짓(F)으로 완전히 반대로 해석하는 우리의 한계로 보입니다. 장님 코끼리 만지는 이야기와 같은 맥락이기도 합니다.
언제 어디서나 동일한 하나님이지만, 우리는 그 일부밖에 보지 못합니다. 그것만이면 좋겠지만, 거기에 우리 입맛대로 봅니다. 우리 입맛대로 투영해서 만든 그림자만을 놓고 따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구약에서는 아브라함의 번영의 약속만을 보고 신약에서는 명령을 외면한 채 사랑만을 봅니다. '래디컬'은 그 부분을 정확하게 짚었습니다. 하지만 래디컬하지 않은 이유는 비기독교인 중에 성경 내용을 좀 사람들은 기독교인이 가진 그런 헛점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 역시도 기독교인이 되기 전에 그 부분에 대해서 비판적이었는데, 기독교인이 되고 나서 저도 같은 길을 걷고 있습니다. 여전히 마음은 불편하지만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서 오늘의 힘겨움에 위안을 얻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히려 기독교인이 아닐 때에는 이 부분에 있어서 가식적이지는 않았는데 말입니다.
인터넷에 나오는 설교를 들어보면, 해석의 여지가 없는 몇몇 구절들 이외에는 다 사람의 관점이 들어가고 그 관점에만 방점이 찍힙니다. 어느 교회 목사님은 계속 번영만 이야기합니다. 번영해서 나누어야 하지 않느냐는 양념이 들어가긴 하지만 번영에 방점이 있고, 그것을 주제로 다른 구절들이 그에 맞게 편집되어서 들어갑니다. 어느 교회의 설교는 정치적인 관점이 들어갑니다. 예전에는 굉장히 신학적이지만 영적인 것이나 감동이나 치유의 역사에 대해서 비판적인 교회에도 있어 봤습니다. 누군가에게 축복하는 것 하나를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성경공부를 신학공부하듯이 하는 성도들이 많은 교회이기도 했는데, 목사님보다 성도가 성경 구절 및 해석을 잘해서 사람들이 목사님 설교에 은혜를 못받더군요. 결국 목사님이 나가셨습니다. 그 중에 나쁜 사람들이 있었느냐. 아닙니다. 따로 만나보면 다들 좋은 분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공동체가 그것 하나를 품지 못했습니다. 그 이후 교회를 옮기면서 하나님의 음성을 직간접적으로 듣는 분들도 많이 보았고, 그런 분들 중에서 서로 품지 못하는 모습은 참 자주 보았고, 반목하는 모습도 가끔씩 보았습니다. 아, 저렇게 말씀을 직접 받는데 서로 다르게 받는구나 싶었습니다. 가끔씩 하나님 말씀이 들리지 않냐는 질문도 받은 적이 있습니다. 글쎄요. 음성이 들린다기 보다는 어떻게 해야지라는 또 다른 마음이 들어오는 경우가 가끔 있는데, 그게 나로부터 나온 것인지 다른 것인지 확신이 없어서 되도록이면 잘 아는 성경 구절 몇 개를 놓고 그 생각에다가 물어봅니다. 그리고 몇 번은 무섭게도 하나님께로 부터 거쳐온 생각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적이 있습니다. 그게 제가 하는 최선이기에 살아가는 모습에 확신이 별로 없습니다. 무언가 말씀이 왔는데 정말 강력하게 오고 다른 여지가 없이 오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부럽기도 하고, 내가 모태신앙이 아니라서 이런가 내가 쓸데없는 생각이 많아서 그런가 싶기도 합니다.
영화 인터스텔라에 보면 MANN박사가 악행을 하면서 '나를 너무 욕하지 말게 너는 이런 시험을 당해 본 적이 없잖아'라고 말합니다. 누구는 시험에 실족하고, 누군가는 그런 시험을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셔서 실족하지 않았는데, 자기가 잘해서 지금까지 선하게 잘 사는 줄 압니다. 누군가는 비슷한 시험을 극복한 다음 하나님이 도우셔서 극복한 줄 모르고 다른 실족한 사람을 정죄합니다. 아마도 하늘 아버지께서는 이런 저런 말 이전에 발 헛디딘 이를 끌어다가 올려주기를 원하실 겁니다. 제가 그렇게 못 산 것을 회개합니다. 이제 그런 걸 알게 하셨으니 다음에는 행동할 수 있게 되기를.
자기 관점에서만 해석하는 것은 '래디컬'이라는 책도 피해갈 수가 없습니다. '래디컬'에서 우리가 편한대로 해석하는 부분을 명쾌하게 짚었지만, 또한 동의할 수 없는 부분들도 많이 있었습니다.복음을 전해듣지 못한 사람들 또한 구원받을 수 없고 다른 방법이 없다(이 부분을 동의하기는 합니다)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만약 듣지 못한 것이 면책의 이유가 된다면, 복음을 전달해서 괜히 선택하게 만드는게 그 사람들 구원을 막는 게 된다고 논리를 펴는데, 좀 가혹합니다. 그런 식이라면 우리는 복음을 받아들이고 그 첫사랑의 감격이 가득할 때 어떻게든 바로 죽는 게 가장 좋습니다. 많은 기적을 체험하고도 첫사랑을 잊고 돌아서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원시부족 복음화를 위해서 아기를 포함한 가족을 데리고 선교를 가서 모두 죽임을 당하는 대목을 보면, 저자의 논리로 보면 아기는 인격적으로 주님을 만난적이 없는데 어떻게 구원을 얻으라고 선교사님이 그런 결정을 했을까 싶습니다.
결국 한쪽 이야기를 들으면 그 이야기가 맞는 것 같고, 또 반대쪽 이야기를 들으면 그쪽 이야기가 맞는 것 같고, 그걸 하나로 이을 수 있는 고리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고차원의 무엇을 저차원으로 투영해서 조각난 해석을 하는 것 이외에 이해할 방도가 없듯이, 우리가 알고 있는 논리, 우리가 정의를 서술하는 방식도 진리에 비해 너무너무너무 차원이 낮아서 한쪽 시각만 박혀 있고 서로 모순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언젠가 하나님 부르시면 이 모든 것을 알게 될까요.
'래디컬'에서 마지막에 성도에게 권하는 실험은 비교적 무난합니다. 아직 해볼만한 한 것 같습니다. 그 중 앞의 두개는 특히 그러합니다. 세계를 품고 기도하라. 인간적인 것, 인간적인 이해, 인간적인 계획 그 아무것도 작동하는 게 없다는 걸 이제는 알겠습니다. 기도합니다.
그리고 성경을 샅샅히 읽으라. 개인적으로 가장 기대하는 부분입니다. 무언가 아귀가 맞아떨어져서 받아들이는 것은 불가능함을 알겠습니다. 마음이 먼저 바뀌고 그 다음 받아들이게 되겠지요. 다른 책을 읽는 게 무언가 컴퓨터에 프로그램을 까는 기분이라면, 성경을 읽는 건 운영제체를 바꾸는 일인 것 같습니다. 언제부터 그런 생각을 가지게 되었는지를 따질 새가 없이 생각이 바뀌어져 있습니다. 성경을 처음 봤을 때 주술호응이 안 맞다고 한 줄 도 못 읽어가던 때를 생각하면, 정말 많이 변하기는 했습니다. 좋은 스승이신 주님께서 부디 포기하지 마시고 끝까지 이끌어주시길.. 나를 이끌어주실 좋은 스승이 없다면, 지금 이해할 수 없어도 나중에는 이해하게 되리라는 기대도 할 수 없습니다. 더불어 둘로스를 시작하면서 하던 기도가 결실을 맺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제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기를, 눈을 뜨게 하셔서 진리를 보게 하시고, 마음을 부드럽게 하셔서 옳습니다. 옳습니다 주님.하고 나아갈 수 있기를. 어서 이 아귀가 맞지 않는 틈바구니에서 벗어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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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호정님의 댓글
류호정 작성일
장님들 세계에서 거대한 코끼리의 한 부분을 만지고 있는 내가, 코끼리 전체 모습을 그나마 상상해 볼 수 있는 방법이 문득 떠오르는데요... 내 양옆, 위로 부터 사방 팔방으로 지체들을 세워 코끼리를 완전히 둘러싸고 같이 만지는거에요. 그리고 나누는거지요 자기가 만지고 있는 코끼리의 느낌과 체온을...
그냥 지체들과 하나님을 나누고 듣다 보면 내가 다 볼수 없었던 하나님의 그 크심이 그려지고 느껴져서 그런 생각이 들었나봐요. ㅎㅎㅎ 진솔한 나눔이 얼마나 귀한지 모르네요. 정말 나눠주신데로, 엄청난 질문과 궁금함속에서도 하나님께 붙어 계시며 그 속에서 열심으로 찾으려는 형제님의 모습을 통해 많은 귀감과 은혜를 받습니다.
떄는 주님께 속한거지만, 형제님의 삶이 말씀으로 해석되는 은혜의 때가 속히 임하실거라 믿어요. 그 여정을 처지가 같은 지체들과 함께 가며 기다립시다. ^^

Edward님의 댓글
Edward 작성일
요즘 제가 커피가 과했는지 제가 쓴 걸 다시 읽어도 좀 시니컬 하게 읽혀지네요. 주님을 경험한 것을 서로 나눔으로써 주님을 알게된다는 자매님 말씀이 크게 위로가 됩니다. 저도 최근에야 그렇구나라는 걸 느꼈어요. 주님과 경험한 것을 공동체에서 나누지 않으면 그분을 알 수가 없겠구나. 요즘은 주님께서 저보고 인내가 부족하다고 하시는 걸 느끼는데요. 같이 기다려 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