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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사이플 14기 <영적 리더십> 독후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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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여리원
조회 648회 작성일 25-03-25 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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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리더십> 을 읽고 *긴 글 주의

디사이플 14기
화요일 저녁 장정하 포이맨님 반
여리원




  첫 몇 장을 넘기면서, 그동안 기억하고 싶지 않던 교회 리더 자리에서의 수 많은 일들과, 내가 생각하는 ‘리더’ 라는 정의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우선, 나는 ‘리더’ 라는 말의 권한은, 상대방에(그들을 섬기는 것이기에) 있지, 본인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무리 그 어떤 섬김의 자리에서, 무리에서 리드를 해야할 입장인 것이 팩트라 할지라도, 나를 스스로 리더로 소개하는 것도, 나를 스스로 리더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조차 싫었던 것 같다. 초등학생 때야 반장하고 부반장하면 기분좋고 어깨가 들썩했지, 사회인이 되고서 어떤 집단의 리더, 그 것도 교회에서의 리더 라니...... 내 기도와 말씀읽기도 잘 못하면서 그들의 영을 위해 기도하며 하나님께 그들의 것 까지 모두 내려놓는 그 무게를 생각하니,  ‘낮은 곳으로’ 라는 찬양이 절로 생각난다. 심지어 세상과 교회 안에서의 삶이나 행동이 다르지 않아야하는데, 믿지 않는 사람들로 섞인 일터나 세상 속에서 그 마음을 지키는 것은 참 쉽지 않다. 그리고 다 괜찮게 보이고, 나만 빼고 신실해보이는 것 같지만 사실은 모두가 아픈 교회라는 곳 안에서 진리로 마음을 지키는 것은 더욱 더 어렵다고 생각한다.

  이 책의 글쓴이가 앞서 고민했던 것 처럼, 나에게도 질문해 본다. 세상의 리더십과 영적 리더십은 과연 달라야 할까? 그 것은 마치 교회에서는 하나님을 믿고, 교회 밖에서는 믿지 않는 것과 과연 무엇이 다를까. 하나님은 한 분 이시고, 나도 한 명이고, 내게 주신 이 땅에서의 삶도 마음도 하나이다. 내가 여러개가 아니란 말이다. 이 곳은 지역 특성상 자기계획형인 분들과 이성적인 분들이 참 많다. 그래서 다른 곳 보다 유독 이 곳에서 많이 들리는 말들이 있다. “현실적으로”, “계획에안맞아”..... 예배드리고 나와서 목장이나 교제시간등 에서 저 대사들을 들을 때 마다, 난 정말이지 찬물이 쫙 끼얹어지는 느낌이다. 말씀 잘 듣고, 성경읽고 나와서는 말 끝의 결론 마다 자신들도 모르게 저 말을 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또한 본인에겐 굉장히 관대하면서, 뒤에선 형제 자매들을 겉모습으로 판단하고 정죄하고 자기랑 조금 다르면 교묘히 험담하고 배척한다. 내가 따라야 할 리더가 이러한 모습일 때 시험에 많이 들었다. 물론 우리는 주신 삶 최선을 다해 살아야하지만, 저건 진짜 ‘내’ 가 내 삶의 주인임을 선포하는 말들이라고 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비난하는 것은 절대로 아니지만 (나도 죄인이고 나도 부족하니까...), 개인적으로 저런 말들을 자주하는 자들이 리더가 되는 경우에, 자신이 섬겨야 할 자들에게 ‘자기’ 기준으로 인한 교만을, ‘리더의 권한’ 으로 착각하고, 자신이 주체가 되어 해맑게 그 힘을 휘두를 때 마음이 힘들었던 것 같다. 영적리더 자리에서 내가 중심이되거나, 세상의 것들을 힘껏 끌어오는 것도 문제지만, 세상적리더 자리에서 마음의중심(하나님)을 잊고 분리하는 것도 큰 문제라 생각한다. 고로, 세상에서의 리더와 영적리더는 달라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결국 ‘내’가 주체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체가 되어 하나님이 내 삶에 거하시는 거룩한 삶을 내가 살아갈 때에, 또 세상과 교회를 분리하지 않고도 마음의 중심이 오직 하나님이 될 때에, 내가 섬겨야 할 자들에게 꼴을 먹여주는 리더의 삶을 살게 되지 않을까?

  지금도 그렇지만, 리더의 자리에 있을 때 마다 가장 어려운 점은, 자꾸만 ‘내’가 주인이 되는 것이다. ‘내’가 좋아하고 원하는 그림을 나도모르게 계획하고, 미리 상상하고 예상을 하려 할 때 그렇게 되기 쉬웠던 것 같다. 가까운 예로, 내가 너무나 사랑하는 우리 찬양팀을 예로 들고 싶다. 큰 예배나 집회 때 마다 너튜브나 카메라가 의식되어지는 상황들이 어쩔 수 없이 생긴다고해서, 우리가 예배하다가 찬양하다가 콧물 눈물 범벅되고 그런게 카메라에 잡힐 걱정이나, 혹은 카메라에 내 모습이 어떻게 나올지 외모걱정이 앞서면, 하나님 보다 ‘내’ 가 앞서는 것이고, 우리는 당연하고 공동체도 함께 흔들리게 되지 않겠는가. 만약, 축복의 말이, 서로의 삶이 아니라 외모칭찬에 집중되고, 서로 카메라에 잡히는 모습들을 집중적으로 모니터링한다면, 팀 안에서 영적으로 당연히 혼돈이 오지 않겠는가. 이 안에서 리더는 따로 있지만, 공동체에선 찬양을 ‘함께’ 이끄는 자들인데, 영적으로 서로 단단해야한다고 생각한다. 무엇이 리더이고 리더십인지는 내가 어떻게 해야하나가 아니라, 기본적으로 서로의 영을 위하고 ‘함께’ 말씀을 읽는 시간이 더 많고, 서로의 기도제목들을 알고, 기도의 자리가 ‘함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것들이 모두 모이지않으면 세상에서 말하는 그냥 회사 안의 어떤 노래하는 팀 이나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한다. 주일에 우리가 정신없고 신경쓸게 많아도, 이 모든 것들로부터 자유해 우리를 다 내려놓고, 송폼 확인하고 악보볼게 아니라, 우리의 찬양이 곧 선포임을 깨닫고, 우리가 입술로 손으로 섬길 때 에도 서로 마음으로 기도하며 아이컨택을 하면서, 성도들과 함께되어 서로 기도해야 마땅하다. 예배 안에서 우리의 한 주를 지켜주신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 것을 찬양으로 선포해야 하나님이 살아계심에 대해 모든 성도들이 확신할 수 있고, 각 사람 마음에도 울림이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미국 동부로 처음 왔을 때, 내 인생에서 ‘교회’ 하면 딱 떠오르는...기가막힌 일이 있었다. 내가 대예배 성가대 반주자로 새로 왔을 때, 목사님이 조심스레 말씀하시기를 그 교회는 지휘자가 매번 몇 달 못버티고 줄행량을 친다고 한다. 이 것 뿐만이 아니라 입에 담기도 뭐한 일들로 목사님이 쫓겨나시고 교회가 반토막나고, 청년도 나 포함 둘 셋 뿐이었다. 나는 그 때 학생이었지만, 그래도 주신 모든 것에 감사하기로 하고 그 어떤 상황도 문제로 보지 않으리라 마음먹었다. 주일에 돈 벌면 안되지만 그 때는 내게 주신 능력으로 내가 예배를 올릴 수 있다는게 감사했고 그 것으로 유학을 할 수 있게 이끌어주셔서 감사했다. 그리고 결국 이번 지휘자도 떠나면서 내가 전공하지도 않은 지휘까지 떠맡게 되었다. 근데 손이 아쉽게도 두 개 뿐이라 내가 피아노를 치면서 지휘를 제대로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면서 그 성가대에 계시던 모든 할머니 할아버지 권사님 분들이 한 두 분 빼고 갑자기 싸우시고 험한 욕들을 하시고 그 불똥과 기싸움들은 늘 마지막에 나에게 튀었다. 나는 그 것을 문제로 보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면서 매주 섬겼지만 이쑤시개 하나로 위태롭게 모래에 서있는 그런 느낌이었다. 내가 찬양을 준비하고 이들을 이끌어야하는데 그들끼리 욕 하면서 싸우고 있고, 심지어 너무나 연세가 많으신 7-80세 분들이셨고 내가 찬양을 연습시키면 그 분들 중 한 분은 약간 기싸움 같은건데,  다 아니라고 다 틀리다고 약간 날 왕따(?) 로 만들어서 드라마 그대로 일찐마냥 분위기를 동요시키고, 당신께서 예배 바로전에 다 바꾸고 다 마음대로 정해버리셨다. 이게 매 주 반복되다보니 담임목사님께서 집합을 시키셨는데, 한 분 빼고 단체로 그자리에 나오지 않았다. 목사님은 너무 화가나신 나머지, 원래는 나를 도와주실 중간 분(?) 을 부리더로 세우시려다가 갑자기 “이 분들은 순종에 대해 연습을 먼저 시켜야 한다” 면서 나보고 좀 참고 꾸역꾸역이라도 똑같이 이어가라 하셨다....하지만 더 이상 힘이 없던 나는 그 때 포기가 되었던 것 같다. 매 주 성가대연습을 대적기도하고 들어가는 심정은 정말 참담했다. 우리의 적은 서로가 아닌 오직 사탄인데 말이다. 그 교회에서 성가대반주 말고도 가끔 ccm반주도 했었는데, 나는 성가대 반주만 해왔던 터라, 아무리 피아노를 전공했어도 ccm 반주는 어떻게 유려하게 하는건지 잘 몰랐다. 그래도 최선을 다했지만, 모르는 찬양을 갑자기 주시며 키업을 부탁하실 때엔 대략 난감이었다. 아무 악기도 없이, 심지어 전자피아노가 아닌 그랜드 피아노로 모든 악기 소리 공백을 다 채우는 것은.....내가 아무리 하나님만을 위해 섬긴다 해도, 우리 목사님에겐 나의 모든 것들이 부족했던 것 같다. 그 날 밤, 그 어떤 격려의 말도 없이 목사님께선 한 밤 중 우리 집 앞 주차장까지 날 불러내서 나에게 크리스챤이 맞는지 물어보셨다. 세 사람의 역할을 (지휘자, 성가대반주, 복음성가 반주) 다 하고 있었는데 어떤 격려도 없으셨으면서. 크리스챤인데 ccm을 잘 모르는게 의아하다고 다짜고짜 나에게 “섬기는 것을 일로 생각하는 것 같다” 라고 하셨다. 내가 그 찬양을 잘 몰라서, 목사님 기준에 내가 맞지않아서, 내가 크리스챤이 맞는지 물어보러 주차장까지 찾아오신 것이다. 내가 하나님 안에서 어떤 삶을 살아왔고, 또 살고있는지 아무것도 모르시는 그 목사님이 나에게 그 날 밤 준 상처는 꽤 오랫동안 나를 괴롭게 했다. 근데 하나님이 세우신 그분께 난 순종을 하고싶었고, 상처받은 것도 털어놓으며 장문의 카톡을 보냈었으나... 그 분은 “목사는 원래 판단하는 자리에 있는 사람” 이라고 하셨고 담임목사가 섬기는자를 그렇게 판단한것은 당연한 것 이라고 하셨다. 그렇게 나는 그 교회에 더는 나갈 힘이 없어졌다.

  하지만 감사하게도 돌이켜보면 이 날 덕분에, 그 섬김의 자리 무게에 대해서, 리더의 무게에 대해서 많이 알게 하셨던 것 같다. 새누리에 와서 목자로 섬겼을 때에도 순종해야함을 알지만서도 매 주 목장 문 앞에서 “들어갈 자신이 없는데 왜 자꾸 나 이거하라는거에요” 라고 눈을 질끈 감고 하나님과 실랑이 하다 들어간 것 같다. 왜냐하면 ‘나’ 를 죽이니, 정말 이 사람들의 영의 무게(?) 가 느껴지고 그게 나에겐 좀 무거운 사명감이었던 것 같다. 특히나 동부 교회에서 겪은 일로 인해 그 어떤 자리도 자꾸 내 자신과 하나님께 끊임없이 질문하게 되는 것 같다. ‘하나님, 저는 너무 약하고, 제 자신 변호도 잘 못하는데, 제가 심지어 그 영을 위해 기도해야하는게 맞나요.....전 억울해요 억울하다구요’. 청년부 전 이목사님께서 그런 말을 하신적이 있다. 목자의 자리는 “내”가 하고싶어 하는 사람을 앉힐 수 없다고. 그 때는 무슨 뜻인지 몰랐으나, 이제는 알 것 같다. 영적리더의 무게를 조금이라도 안다면, 내 삶의 주인이 하나님이라면 “내가” 섬겨야겠다, “내가” 목자를 해볼까 이런 말들이 절대 나올 수 없다는 것을.

    국제콩쿨에 미쳐있고 명성과 명예에 죽고 못살던 이전의 내가 지금 이 곳에서 산다면, 어떻게든 회사에서 영주권을 더 빨리 받기위해서 “디사이플 기노스코가 뭣이 중요한디!” 하면서 교회는 뒷전이고 일에만 몰두를 하며 살았을 것 같다. 하지만 지금은 ‘내가 짤릴지언정 교회는 가고 만다’ 이런 마음으로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우선이 되었다. 우리 보스는 믿지않는 자이지만, 이제는 내가 그 무엇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란 것을 알게됐고, 면접때 모든사람들에게 “당신은 교회에 다니냐” 를 꼭 물어보고 안뽑는다ㅋㅋ 그렇지만 자기가 힘들 때 기도해달라고 한다. 나는 이런 내가 자랑스럽다. 맞다. 나는 예수쟁이고 하나님에게 미친 자이다. 하나님 없이 난 하루도 살아갈 수 없는 피조물이고, 교회에서만 신실하게 살고 일터에서 다른 내가 되고싶지 않다. 목장에서 주식얘기 돈얘기 이직얘기 듣고싶지않은 이유도 하나님 앞에서 정말 그 것들은 아무 소용도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런 헛된 얘기 보다 하나님 안에서의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말하고 싶은데 그럴 사람이 많지 않아 가끔 신앙적으로 외로울 때가 있다. 일주일에 한 번 뿐이라 아쉽지만, 포이맨님이랑 가끔 그런얘기 할 때 속이 시원하다. 내가 직장에서 돈을 받는 것이, 나만 잘먹고 잘살기 위함이 아니길 바란다. 이 돈이 오직 나 하나 먹고 살다 가려고 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흘러가길 바라고, 나 또한 내가 일하는 이유가 돈을 벌려고가 아니라, 하나님나라의 확장을 위함이기를 소망한다. 내가 영주권을 접수를 하네 마네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눈치보고 하는 이 모든 것들도, 선교에 대한 갈증이 더욱 더 깊어지며 결국엔 하나님 사역에 동참하는 날을 위함이 되기를 꼭 소망한다.

  이렇게, 이 책을 읽으며 한 문장 한 문장 계속 멈추어 나를 돌아보게 되었는데, 책에서; 영적 리더는 일반적으로 하나님과 동행해 온 세월이 긴 편이다. 그들은 성령이 세미한 음성을 들려주실 때를 식별하고 하나님의 손길이 함께 하실 기회를 가려낸다. 다른 사람보다 은사나 재능이 많아서가 아니라 하나님과 동행해 온 경험이 많을 뿐이다. 라고 한다. 따라서 리더는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곳을 볼 수 있도록 가르쳐야한다 라는 것이다. 나의 기준이나 세상 것이 아니라!

  나에게 매일매일 기적을 생생히 보여주시지만 나는 이 책에 나와있는 것 처럼 하나님의 음성을 아직은 듣지 못했다. 참 신기한게 올 해 2025 나의 기도제목 중 하나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다! 나는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너무나 확신할 수 밖에 없도록 하나님께서 진짜 진짜 많은 기적과 놀라움을 직접 보여주신다. 얼마 전엔 내가 드리는 찬양이 내 삶의 선포였구나 를 알게 하셨고, 뭔가 요즘 성령의 9가지 열매가 한 번에 와르르르르 맺히도록 안좋은 일들(나중엔 은혜로 고백하겠지만...) 도 많이 생기고, 덕분에 그 9가지가 한 번에 배워지는(?) 이상한 경험을 하고 있는데, 내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직 예수님을 모르는 자들에게 힘있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선포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소망한다. 하나님의 음성은 낮을까 중저음일까 고운 목소리실까 온도는 어떨까 냄새는 어떨까 모든 것을 궁금해하며 새벽 2시, 이 길고 긴 독후감을 마친다.

할렐루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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