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부 샌프란시스코 도시 선교를 준비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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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3,296회 작성일 13-06-22 1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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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부 샌프란시스코 도시 선교를 준비하며 평소 존경하는 한 목사님이 쓰신 주일 예배 설교문을 우연히 대하게 되었습니다.
받은 은혜가 커서 새누리 식구들과 나누고 싶고, 또 이 기회를 빌려 샌프란시스코 도심 선교를 위해 기도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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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대수 . 행복의 나라로 (뮤직 비디오)
< 출처 : http://www.youtube.com/watch?feature=player_detailpage&v=6kHiw_taToA >
들어가는 말
우리는 지금1970년대 이후 젊은이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던 포크 락(folk rock) 가수 한대수의 노래를 들었습니다. 김민기, 한대수, 전인권 등의 이름을 아직까지 기억하시는 분들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오후 예배 시간에 포크 락 뮤직비디오를 보여 주다니……” 하며 언짢게 느끼시는 분들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조금만 인내하며 들어 주십시오.
한대수
한대수. 이 사람은 소위 말하는 좋은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할아버지가 미국에서 신학을 수업한 교수요 목사였습니다. 서울공대를 다니던 그의 아버지는 한대수가 태어난 지 백일이 채 못 되었을 때 미국으로 유학을 떠납니다. 그런데 당시 미국에서 수소폭탄의 세계적 권위자 밑에서 배우고 연구하던 그의 아버지가 갑자기 실종되어 버리는 충격적인 사건을 겪습니다. 안개와 같이 증발해 버린 얼굴도 알지 못하는 아버지. 한대수는 할아버지 집에서 자라면서 외로움과 소외 가운데에서 세상의 아픔과 눈물에 서서히 눈을 떠 가게 됩니다. 통기타 하나를 벗삼아 보낸 사춘기를 지나 그 역시 미국으로 향합니다. 그런데 실종되었던 아버지가 기적과 같이 다시 나타나 만나게 됩니다. 그러나 그는 한국말을 다 잊어버렸고 백인 여자와 결혼해 있었으며 과거에 대해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너무나 이상한 사람으로 변해 있었습니다.
가난과 고독, 불확실한 미래의 불안과 씨름하며 세상의 고통과 눈물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삼아 가면서 그는 1970년대에 '행복의 나라로'를 불렀습니다. 세상은 비극으로, 고통과 저주로 얼룩진 곳이었지만 그는 대중들과 자신의 영혼을 향하여 그 모든 좌절들을 딛고 일어나 '행복의 나라'로 나아가자고 절규합니다.
그는 뉴욕에서 한 몽골인 여자를 만납니다. 스무 살이나 연하인 그녀는 고질적인 알코올 중독자로 술 취하지 않는 날이 한 달 중 며칠에 불과한 폐인이었습니다. 한대수는 그녀를 자신의 숙명처럼 떠안습니다. 일상생활을 전혀 하지 못하는 여자의 인생의 저주를 자신의 것으로 삼고 '결혼'을 합니다. 뿐만 아닙니다. 그는 마약 중독과 정신분열증으로 식물인간 보다 별로 나을 것이 없이 사는 그녀의 전 남편(ex-husband)을, 끼니를 잇기에도 벅찬 자신의 집에 들여서 돌보아 주는 그야말로 '터무니없는 사내'였습니다.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이런 터무니없는 인간이 있습니까?
언젠가 한국으로 돌아온 그의 인터뷰를 본 적이 있습니다. 그 인터뷰 동영상에는 술을 마시기 시작하면 소주 30병을 연달아 들이킨다는 그의 아내 옥사나(Oksana)가 취해서 방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모습이 나옵니다. 고정적인 수입도 없고 아무 것도 보장된 것이 없는 그가 그러한 인생의 모순과 아픔을 한 몸에 짊어진 채, 이 시대의 상함을 입고 고통 받는 자들을 향하여 '행복의 나라'로 나아가자고 절규하는 것을 들었을 때 저는 말할 수 없는 전율을 느끼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인터뷰 내내 그는 바람처럼 자유로웠으며 그의 모습에는 결코 꾸며낼 수 없는 기품(氣稟)이 서려 있었습니다.
절망의 시대
세상이 불공평하다고들 말합니다. 이 세상은 썩었고 기득권자의 횡포로 말미암아 부패와 모순으로 병들었다고들 합니다. 자신의 불행과 고통이 이 세상의 구조적인 모순과 악 때문이며, 내가 살아남기 위해 그것을 뒤집어엎어야 한다고 절규합니다. 이보다 온건한 사람들은 자신이 신뢰하는 정치인을 내세우고 정권을 잡아 그러한 모순을 해결하여 좀더 살기 좋은 나라로 만들려는 합리적인 노력을 기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에 이 세상은 너무나 단단합니다. 잘 흔들리지 않습니다.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의 정글의 법칙이 너무나 강고(强固)하게 형성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기존 질서를 바꾸려면 또 한 번 엄청난 피를 흘려야 할지 모릅니다. 하나를 얻으려면 하나를 주어야 하고, 때로는 하나를 주어도 하나를 얻지 못할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인과응보(因果應報)와 ‘뿌린 대로 거둔다’는 바둑판처럼 교직(交織)된 엄혹(嚴酷)한 생존 법칙의 세상 속에서 약하고 소외되고 삶의 자원이 결핍된 사람들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개천에서 더 이상 용이 날 수 없는 세상이 되었고, 사회경제적 계층의 이동이 사실상 불가능한 시대입니다. 그래서 이 시대의 절반의 사람들은 절망해 있습니다. 죽음 외에는 이 고통과 저주에서 헤어날 길이 없습니다. 이러한 절망이 마치 고무 피복이 벗겨져 구리 철사가 드러난 고압 전선처럼 위태롭게 노출되어 있는 곳이, 종종 볼 수 있는 노동자들의 ‘철탑 고공 농성장’입니다. 가장 추웠던 지난 겨울 동안, 산 자의 땅으로부터 바깥으로 내몰린 그들은 차디찬 허공에 매달려서 이 시대의 슬픔과 절망을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이러한 사회구조적 모순, 인간의 고통과 비극을 해소하려는 수많은 노력들이 있어 왔습니다. 그러나 그 중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작동한 것이 있었습니까? 물론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다양한 방법으로 사회구조의 모순을 파악하고 개선하는 일에 힘을 보태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결정적으로 중요한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터무니없는 일들을
자원이 한정된 국가와 사회는 필연적으로 이곳을 막으면 저곳이 터지고 저곳을 막으면 이곳이 터지는 현상을 드러내게 됩니다. 그리고 정책의 변화와 새로운 조처들은 항상 기득권자들의 필사적인 저항을 초래합니다. 그러한 구조적 모순은 아마도 이 역사의 끝 날까지 존속할 것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합니다. 이토록 삭막하고,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세상에, 가끔, 그러나 잊어버리지 않을 정도로 종종, 이 세상의 가치 체계와 병든 양심을 뒤흔드는 '터무니없는 일들'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 작디작은 한 예가 바로 한대수라는 한 남자가 이 시대의 '레 미제라블'이라 할 수 있는 한 남자와 한 여자에게 행한 '터무니없는 짓'입니다. 그것은 도무지 말도 안 되는 일이고 정신 나간 사람이나 할 법한 일이지만, 이 시대의 삶의 방식과 이기적 인간의 비열한 양심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폭풍과 같은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디 그것뿐이겠습니까? 우리가 미디어를 통해 종종 만나는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한국전쟁 때 월남한 여인이 남편을 여의고 아이들을 키우기 위해 시장에 좌판을 깔고 겨울의 혹독한 추위, 여름의 찌는 무더위를 견뎌가며 한 푼 두 푼을 모았습니다. 허기진 배를 다 채우지 않고 모은 돈이, 자녀들이 장성하고 인생의 황혼에 이르렀을 때 보니 꽤 많은 재산이 된 경우도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그렇게 힘들게 모은 재산을 자신보다 '더 불행한 사람들'을 위해 세상에 돌려보내는 경우가 있습니다.
기자가 이제는 할머니가 된 이런 여인을 인터뷰한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어머님께서는 어떻게 이렇게 장한 일을 하시게 되었습니까?” 저는 그 대답을 똑똑히 기억합니다. “사는 동안 있어준 햇볕이 고맙고, 발 밑에 흙과 나라님이 고맙고, 고생한다 욕본다고 손 잡아 준 어르신들이 고맙고, 내 콩나물 사 준 아낙네들이 고마워서, 이 세상이 고마워서......” 여러분, 여러분은 한 번이라도 이런 세계관으로 살아본 적이 있었습니까? 얼마나 어이없습니까? 도대체 이 세상이 그 여인에게 무엇을 해 주었다는 말입니까? 그런데 할머니는 세상을 고마워하며 그토록 ‘터무니없는 일’을 하며 삶을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지요? 터무니가 없어도 한참 없는 일입니다.
우리는 그런 일을 보면 재빨리 칭찬합니다. 서둘러 경의를 표하고 그 앞을 떠나고 싶어 합니다. 혹시라도 내 양심이 그런 것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들을까 봐 두려운 것입니다. 우리는 헌금을 하고 교회는 그것을 모아 빈자들을 돕습니다. 마땅하고 옳은 일입니다. 그런데…… 그 너머는 없습니까? 우리는 개인적으로 제3세계의 극빈(極貧)한 아이들을 돕기도 하고 사회봉사팀을 꾸려 장애자를 방문하고 독거노인도 위로합니다. 정말 잘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몇 걸음 더 나아갈 수 없겠습니까?
닥터 브루스터 선교사
제가 미국 풀러신학교에서 선교학을 공부한 이래 제 영혼의 중심에 늘 살아있는 한 분이 있습니다. 브루스터(Brewster) 박사의 아내 엘리자베스 브루스터(Elizabeth Brewster) 여사입니다. 브루스터 박사는 억만장자의 자제로 태어나 아이비리그 대학을 마친 수재였습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만난 후 선교사의 삶을 살게 되었는데, 불행히도 수영장에서의 사고로 하반신이 마비되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이에 조금도 굴하지 않고 휠체어를 타고 부부가 함께 전 세계의 선교지를 누비며 선교사들이 현지어를 학습하는 창의적이고 탁월한 방법을 교수하여 개신교 선교 역사에 지워지지 않을 족적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저는 여기서 그 업적을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브루스터 박사는 암으로 비교적 젊은 나이에 주님 곁으로 갔습니다. 홀로 남은 미망인 엘리자베스 브루스터 여사는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아들 제드(Jed, 솔로몬의 아명인 여디디아의 약자)를 데리고 대도시 로스엔젤레스의 흑인 밀집지역으로 이사를 갔습니다. 제드가 백인이라고는 자기밖에 없는 학교를 다니던 그 무렵, 브루스터 여사가 가르치던 클래스의 학생들이 그 집에 가서 놀랍도록 소박한 점심을 나누며 교제하던 장면을 저는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시댁으로부터 건네 온 거액의 유산을 선선히 자선단체에 넘기고 이사한 흑인 동네의 낡고 초라한 집에서 함께 나눈 점심 식사-알루미늄 호일에 싸서 찐 감자와 브로콜리, 갑자 칩과 사과주스가 전부인 그 식탁, 그리고 낡은 카펫과 그녀가 앉아 있던 삐걱거리는 의자를!
흑인 인권이 과거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을 정도로 개선된 지금에 조차도 미국의 흑인들은 백인들이 자신들을 마음으로부터 받아 주리라고 잘 믿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흑백의 피부색은 영원한 분리와 저주의 아이콘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한 백인 모자(母子)가 흑색의 교정으로 걸어 들어옵니다. 이 동네에 집을 샀답니다! 그리고 우리 학교에 다니겠답니다!! 억만장자의 상속자인 그들이, 백인이라면 쳐다보기도 꺼려할 자신들의 삶의 게토(ghetto) 속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온 것입니다.
저의 지나친 상상이었을까요? 아니요, 저는 하나님 안에서 확신합니다. 바로 그 백인 모자의 '터무니없는 짓'으로 말미암아 그 동네, 그 학교의 흑인 아이들의 부드러운 영혼이, 자신들도 한 인간으로 존중 받고 있다는 희미한 느낌, 이 세상이 분리와 저주의 죽음의 땅이 아니라 숨쉬고 살아갈 수 있는 생명의 장소라는 생각을 어렴풋이나마 갖게 되었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은혜-그 터무니없는 짓
이 '터무니없는 짓'을 성경의 점잖은 용어로 '은혜(Grace)’라고 부릅니다. 은혜! Grace! 이 부드럽고 따뜻하고 달콤한 말.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의 행위는 진실로 ‘터무니없는 짓’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에 나온 38년 된 병자를 생각해 보십시오. 이 사람에게 지상최대의 행운은 자신을 연못에 넣어줄 사람을 만나는 일이었습니다. 그 사람이 깡패든, 도둑이든 상관없었습니다. 지나가다가 그저 자신을 연못 속에 밀어 넣어 주기만 해도 그것은 대박이 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절망적인 병자, 이제는 낫고자 하는 소원도 열망도 식어 버린 지 오래인, 살았다
하는 이름을 가졌으나 사실상은 죽은 자에 불과한 이 죄인에게 온 우주를 창조하시고 모든 생명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그분은 죄인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은 분이요, 병자 쪽에서 보면 오직 자기 한 사람만을 위해 세상에 내려오신, 너무나 '터무니없는' 분이었습니다.
교훈과 적용
사랑하는 하나교회의 형제자매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이렇게 임하셨습니다. 깊이 묵상해 보십시오. 세상에! 내가 뭔데…… 도대체 어떻게 나 같은 강퍅하고 무정하고 비열한 죄인에게 하나밖에 없는 아들의 생명을 값으로 주셨다는 말입니까? 말도 되지 않는, 온전한 정신으로는 할 수 없는 터무니없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 세상을 역사의 말미까지 지탱해 주는 힘은 바로 그것입니다. 자유와 평등을 위한 정치적 노력과 희생도 물론 필요할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에 대하여 닫힌 인간의 모진 마음을 열리게 하는 힘은 바로 이런 터무니없는 일들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누군가 고통과 저주에 신음한다 해도 귀 기울이기를 거부하는 인간의 영혼을 깨어나게 하며, 켜켜이 쌓인 이기심과 변명과 합리화로 치장한 비열한 자아를 수치에 떨게 하는 힘이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여러분, 나와 우리 자녀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예수 믿고 구원받고 마음의 평화를 누리고 교회 봉사 잘하고 행복한 가정 꾸미고 적당히 재물을 나누면서 한 세상을 살면 되겠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게 하셔도 잘못했다 탓할 사람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단지 그렇게만 살라고 우리를 부르셨을까요? 아까 제가 브루스터 여사와 그 아들 제드의 이야기를 했습니다. 한대수의 이야기도 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삶을 원하십니까? 여러분의 자녀가 온실 안의 화초처럼 살기를 원하십니까? 아니면 이 시대의 고통과 슬픔 속에 노출되어 시련의 비바람을 함께 견뎌내면서 함께 나아가는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까? 세상에 대해 절망하는 이들을 향하여 세상과 인간은 아름다운 것이며 하나님이 마련하신 행복의 나라는 반드시 존재한다고 외치며 살 수는 없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함께 세상의 가치 체계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터무니없는 삶'을 살아낼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우리 자신이 혁명으로도
분신으로도 피 흘림으로도 이루어 낼 수 없는 행복한 나라를 가리키는 손가락이요, 이 어두운 시대를 밝히는 등불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 앞에 여러분들과 자녀들을 새롭게 올려 드리며 그렇게 하겠다고 결심해 보지 않으시겠습니까?
한대수, 이분이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니라도 좋습니다. 예수님이 종려주일에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수만 명의 군중들이 호산나를 외쳤습니다. 놀라고 시기하는 종교지도자들이 이를 강력하게 저지하려 하자 예수님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이 돌들이 소리를 지르리라(눅 19:40).” 이 돌들이 소리를 지르리라! 우리가 하지 아니하면 하나님께서는 능히 믿지 않는 사람들, 돌들을 통해서도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터무니없는 짓들'이야말로 하나님 은혜의 진수 중의 진수이며 온 세상을 살리시는 신비롭고 불가항력적인 신적 능력을 드러내는 요체이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브루스터 선교사의 집에서 흘렸던 눈물을 기억합니다. 그 날, 16개국에서 온 40여 명의 학생들은 다소 창백하며 나이에 비해 체구가 작은 제드와 그의 어머니 브루스터 여사의 그 ‘터무니없는 일’에 압도되어 뜨거운 눈물을 흘렸고 아무도 먼저 자리를 뜨지 못했습니다. 저는 그때 나이만큼 교회를 다닌 사람이었지만 ‘나는 크리스천이 아니다, 나는 크리스천이 아니다’라고 수없이 되뇌었습니다.
그로부터 20여 년이 지나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저는 여전히 그런 터무니없는 삶을 살고 있지 못한 비겁한 자신이 얼마나 부끄럽고 미웠는지, 한대수의 노래를 수없이 반복하여 들으면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래서 이 설교를 제 자신이 직접 하다가는 감정이 격해져서 주체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일까 봐 우리 행복을 나누는 하나교회의, 아마도 이런 마음을 공유하리라고 믿는 소중한 많은 지체들 중의 한 자매를 통해 대신 낭독하게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다시 한 번 그 뮤직비디오를 보시고 은혜의 여운 가운데 머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을 사랑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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