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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admin
조회 2,495회 작성일 12-09-30 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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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Annette Baek


 

            '가을날' - 라이너 마리아 릴케


주여, 가을이 왔습니다.

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해시계 위에 당신의 그림자를 드리우시고

들판에는 바람을 풀어 놓아주소서

 

마지막 열매들이 완전히 영글도록 명해주시고

그들에게 더 남쪽의 맛을 이틀 더 베푸시어

그들이 무르익도록 재촉하시고

묵직한 포도송이에는 마지막 단맛이 스미게 하소서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더 이상 집을 짓지 않습니다

지금 혼자인 사람은 오래도록 그렇게 남아

잠자지 않고 책을 읽고 긴 편지를 쓸 것입니다.

나뭇잎들이 뒹굴 때면 가로수 길들 사이로

이리저리 불안스레 거닐 것입니다.

 

 

아직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던 여고 시절, 여린 감수성만 가지고 이 시를 읖조리던 때가 있었습니다서울 정동에 위치한 여고에 다녔던 저는 가을이 오면 덕수궁 돌담길을 폭신하게 덮었던 노란 단풍잎들을 밟으며 등하교를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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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명한 푸른 하늘이 주는 깊이도 잘 몰랐고, 차가와지는 파삭한 공기를 타고 맴돌다 떨어지는 낙엽들이 안고 있을 사연 따위에는 아랑곳하지 않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저 일상의 공간을 문득 뒤덮어버린 가을의 몽한 아름다움에 젖어 친구들과 함께 분홍 종이 위에 이 시를 쓰며 나눴던, 학창시절의 낭만의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작품입니다.

 

그 이후 가을이 매번 와도 다시 찾아보지 않았던 이 시가 이제 인생의 초가을에 접어든 올 가을 문득 생각납니다늘어난 내 나이테의 켜 만큼 커진 틀에 이 시의 언어들이 흩뿌리는 삶의 의미를 가득 담고 싶은 마음으로 읽고 또 읽어 봅니다.

 

괴테 이후 독일이 나은 최고의 문학가 라이너 마리아 릴케..., 그는 젊은 나이에 시를 쓰는 것만큼 무의미한 일은 없다고 하였습니다. 시는 감정으로 쓰는 것이 아니라 경험으로 쓰는 것이기에 70, 80년을 걸쳐 꿀벌이 꿀을 모으듯 의미를 모아야 하며 그래야 마지막에가서 겨우 열 줄 정도의 훌륭한 시를 쓸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사춘기의 설익은 감성에게, '주여, 가을이 왔습니다'는 그저 가을의 운치에 더욱 포로가 되게 하는 언어의 동아리에 불과할 뿐 그 의미를 이해할 밭이 없었습니다하지만 이제 이 싯귀는 담담한 독백이요 간곡한 기도의 시작으로 제 귀에 들립니다

 

'봄날의 꿈과 이상을 펼치려 열병앓이를 했던 이글거렸던 여름의 위대한 시간들을 찬미하며, 내가 씨뿌려 영글은 열매들이 완전히 익도록 살피고 가꾸어야 할 가을의 시간에 절대자이신 주님의 드리움과 손길을 더욱 갈망합니다.

 

 

주님의 그림자 안에 거하여 세상의 바람이 아닌

주님이 풀어 놓으신 바람의 기운으로

내 열매들을 살찌우고 자라게 하길 원합니다

 

많지만 달지 않아 기쁨이 되지 않는 수확보다는,

넘쳐나지는 않더라도 실한 열매 하나 하나로

채워지는 수확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그리고 첫맛에 단 포도보다는

마지막 단맛이 스며나는 묵직한 포도송이를 거두는

제 가을이 되게 하여 주소서

 

그러나, 행여 텅빈 곳간을 바라봐야하는 가을 끝을 맞이한다하더라도

이리저리 불안스레 거닐 일은 없을 것입니다.

 

제겐 영원한 주님 당신의 집이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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