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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반 기독교적 정서의 원인 분석: 소통없이 호통만 치는 기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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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백윤기
조회 2,488회 작성일 12-05-05 1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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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www.usaamen.net/


열린말씀 컨퍼런스-'예수천당 불신지옥' 아닌 세상과 소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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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4/20 (금) 18:42 ㆍ추천: 3  ㆍ조회: 1054     small_print.gif  scrap.gif

제10회 동부지역 열린말씀 컨퍼런스는 “거룩한 소통: 복음적 대화를 회복하라”라는 주제로 4월 20일(금)부터 22일(주일)까지 필라델피아 임마누엘교회에서 열렸다.

성도들을 대상으로 한 집회는 20일(금) 저녁에는 '반 기독교적 정서의 원인 분석: 소통없이 호통만 치는 기독교(정민영 선교사)'와 '세상과 소통하기(한규삼 목사)'등 2개의 강의가 45분씩 진행됐다. 토요일 새벽에는 '변천하는 세상과 소통하는 영원한 말씀(김한요 목사)', 저녁에는 '정보적 신앙이 아닌 고백적 신앙을 향하여(한성윤 목사)'와 '공동체를 건강하게 하는 소통의 원리(이규섭 목사)'가 진행된다.

정민영 선교사(위클리프성경번역선교회)는 '소통없이 호통만 치는 기독교'라는 제목의 강의를 통해 세상과 소통하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호통을 치는 오늘날의 선교와 전도의 모습이 오늘날 반기독교적인 분위기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강조했다. 한규삼 목사(뉴저지초대교회)는 '세상과 소통하기'라는 제목의 강의에서 로마의 박해가운데 소수인 교회가 세상과 소통하고 복음을 전하게 된 지혜를 베드로전서 3장 13-16절에서 찾았다. 컨퍼런스 내용은 강사와의 인터뷰를 중심으로 작성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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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클리프성경번역선교회 정민영 선교사

소통없이 호통만 치는 기독교
(위클리프성경번역선교회 정민영 선교사)


잘생각해보면 우리가 '증인이 된다' '복음을 전한다' '선교한다'는 것은 복음을 커뮤니케이트 한다고 정의할수 있다. 커뮤니케이트를 번역하면 '소통'이다. 소통은 쌍방향성을 가지는 것이다. 일방적으로 호통하는 것은 소통이 아니라 선전이다. 주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모델인 요한복음 4장의 우물가의 사마리아 여인에 대한 본문을 보자. 그 여인이야 말로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함부러 대해도 될만한 여인이다. 그런데도 메시야 이신 주님이 그 여인을 존중해주시고 처음부터 '예수천당 불신지옥' 하지 않고 그 여인의 관심사에서 시작하여 그 여인의 경계심을 푸시고 소통하시며 이야기를 주고받는 과정을 통해 마침내 복음을 전한다.

복음을 전할때 일방적으로 호통을 치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도대체 어디에서 온 것인가. 선포해야 한다는 말을 우리가 너무나 자의적으로 풀고 있다. 선포란 변형시키지 않은 복음의 내용을 전하는 것으로, 이 시대 사람이 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신 메세지를 전하는 것이다. 선포가 소통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도 소통으로 초청하시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접근하신 것도 하나님의 신권으로 일방적으로 밀어붙이거나 강제로 우리의 마음을 비집고 들어와 바꾸시는 것이 아니고 문밖에 서서 문을 두들기신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주실만큼 우리를 사랑하시지만 절대 강요하시지 않는다. 소통이고 쌍방통행이고 사랑의 표현이다. 사랑은 강요하는 순간 이미 사랑이 아니다. 우리를 스토킹 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시다. 결국은 우리를 초청하시지만 우리가 자의적으로 문을 열때 소통이 된다. 하나님도 그렇게 하시는데, 오늘날 전도가 너무 이상하게도 이단들이 하는 식으로 그렇게 막 나가는 것이 과연 성경적이고 효과적인가. 우리가 세상을 영혼을 너무 쉽게 따 먹으려 하지말고 세상의 마음을 여는 일이 중요하다. 그들이 마음을 열어야 대화가 된다.

청소년을 자녀로 둔 부모도 그런 경험을 한다. 아이들에게 정답을 준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관계가 되어야 해결의 실마리를 준다. 주님도 관계로 오시는 것인데 현대의 전도와 선교에서 '관계'라는 측면이 사라졌기에 호통만 치는 것이다. 복음을 소통한다는 것은 우리를 향해 마음이 닫쳐져 버린 세상의 마음을 다시 얻어, 요즘 흔히 말하는 고객감동을 해서 그들의 마음이 다시 자의적으로 열리도록 하는 길은 무엇일까. 이런것들이 굉장히 중요하며, 소통하려는 것은 이 시대에 중요한 이슈라고 본다.

젊은 세대는 더더구나 그렇다. 부모세대가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면 마음을 닫는다. 소통하는 사람에게는 나이를 초월해서 다가온다. 소통을 하는 앞세대 멘토를 간절하게 원한다. 그래서 예수님의 우물가 사마리아 여인에게 접근하는 모델을 통해 우리가 소통해야 한다. 소통을 하면 말을 하지 않아도 저쪽에서 미리 연다. 삭개오가 그런 경우이다. 예수님이 그 마음을 헤아리시고 많은 사람앞에서 일종의 삭개오의 손을 들어주신것이다. 그래서 삭개오가 감동하고 마음을 열었다.

가장 먼저 소통하기 위해 '관계'를 세워야 한다. 오늘날 신앙생활에서 우리끼리도 관계가 많이 소원해졌고, 더구나 세상하고는 물과 기름처럼 단절되어 있는데 어느날 갑자기 전도하는 날을 정해 막 나가 소리지르고 들어오니 세상은 시끄럽다고 한다. 당신들이 교회에 나가 조용히 믿는것은 말을 안하겠지만 우리를 괴롭히지 말아달라고 한다. 반기독교정서가 높아지는 이면에는 소통에 실패한 우리가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성경적인 관점뿐만 아니라 실질적인 관점에서도 소통이 있어야 한다. 아무리 훌륭한 상담가라도 피상담자와의 관계가 형성이 안되면 아무런 도움을 못준다.

우리가 복음을 소통한다는 것은 결국 그리스도인들이 삶의 현장에서 만나는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과의 관계가 형성이 되는 것이다. 건강한 신뢰관계가 형성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 우리가 예외적으로 여행을 하다가 비행기나 버스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관계가 충분히 안되어도 나누는 경우가 있지만 그것은 우리 삶의 일상으로 볼 수 없다. 그러니 그리스도인들이 처한 곳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연스럽게 이웃으로 붙여준 분들과 평소에 소통을 준비하는 그런 관계형성을 하고 있어야 한다.

그런면에서 우리에게는 끓임없는 딜레머가 있다. 크리스찬끼리만 모여있으니 세상입장에서 보면 크리스찬들은 우리하고 소통할 의사가 없다고 느낄수도 있다. 그런 부분이 해결되면서 그 분들의 마음이 열렸을때 사영리도 전하고 하면 그때는 교감이 되어 복음의 소통이 일어날수 있다. 저는 현대교회가 약간 신흥종교처럼 이상하게 가는 것이 안타깝다고 생각하고, 성경적인 원리와 예수님의 모델을 생각해보면서 세상과 다시 복음을 소통해야 한다.
 

ⓒ 아멘넷 뉴스(USAamen.net)

댓글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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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eyoung Kim님의 댓글

Jeeyoung Kim 작성일

정선교사님의 이야기가 너무 맞다는 생각이 들고, 


열린말씀 컨퍼런스 홈피에 가서 좀 더 자세히 들어보고 싶어지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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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근숙님의 댓글

장근숙 작성일

백형제님께서는 


우리가 믿음으로 나가는데 도움을 주는 다양한 resource 가 있으시네요


여러 방면의 소식을 접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맞습니다! 지금은 이미 부흥회 스타일의 전도는 사람들 마음에 스며들지 않습니다


그만큼 사람들이 지식과 정보를 많이 흡수한 상태이므로----


우리 크리스챤 스스로가 어떻게 하나님에 대해 목말라 하는지를 살펴보면서


위 세미나 내용을 읽으며 많이 동감 되어집니다 


그리고 전도를 어떻게 해야하는지 방향도 보이는 듯 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그리고 황신부님 CD 덕분에 많이 은혜 받고 즐거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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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mmer님의 댓글

Summer 작성일

흠~~~ 글세요.....


저는 개인적으로 소통도 필요하지만 호통도 필요하다고생각합니다.


사실 저는 지하철에서, 길거리에서, 학교앞에서 호통을 쳐야된다고 해도 도저히 못 합니다.


왜? 물론 창피하니,  아니 내가 왜...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믿지않는 사람들에 대한, 한 영혼에 대안 사랑이 없어서..또한 다른 사람에게 주님을 전해햐 되는 복음의 열정이 없어서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제가 보는 반 기독교적 정서의 원인은 소통하는 방법을 쓰지 않아서가 아닌  우리 기독교인들의 삶이 믿지 않는 사람들보기에도 너무 막 살아서(?)... 그들이 보기에도 크리스찬이라는 사람들이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생활을 하지 못해서 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전체적인 말씀을 못들어서 뭐라고 단정할수는 없지만  그렇지만 이분이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는 장면을 예를 들어서 소통의 예로 설명했지만 사도바울의 예를 들자면 사도바울이 언제 관계를 갖고 소통을하며 전도를 하였나요? 그 는 아무곳에 가서든, 감옥이든, 회당이든, 길거리든, 어디에서든, 또 모든 사람들에게 이방인이든, 왕 이든, 지식인이든, 못 배운자든, 등등 이 분의 말씀대로 하면 사도바울의 방법은 호통의 방법같은데... 호통하는것을 무슨 이단의 방법이라고 매도하는것은.....   제 생각에는 오히려 호통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을것 같은데....사실 전체 기독교인들중에 소통없이 호통치는 사람이 몇 프로나 될것 같은지?   예수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은 호통이든, 소통이든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말고 해야되는 것이 맞다고 생각되느데 제가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울뿐입니다.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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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원님의 댓글

이진원 작성일

전도는 관계형성이 중요하겠고 선교는 좀더 담대한 선포가 중요할지도 모르겠네요. 물론 단기선교일 경우 그곳 선교사님과의 협력하에.. 장기 선교일 경우는 역시 그들과의 관계를 맺으며 소통하는 것이 우선이겠지요. 형제님이 올려 주신 글이나 댓글 모두 맞는 면도 있고 꼭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너무 황희 정승 같은 소리지만...) 


단지 제가 글을 읽으면서 드는 생각은 복음전도의 주체를 우리라고 착각하는 일만 없으면 그 어떤 방법이라도 하나님이 때에 따라 지혜를 주시리라 생각합니다. 그 마음 열어 주시는 것 성령님이 하시는 것이니 우리는 고구마(!)가 잘 익었나를 확인하는 젓가락만 있으면 되지 않을까요?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예수님이시니 그 일 끝까지 하시는 분 역시 예수님이시고 우리는 단지 그의 동역자이니까요. 




지난 주 설교 말씀에도 느헤미야의 기도가 잠깐 언급되었는데 저는 느헤미야의 기도를 생각하면서  그가 무엇을 기도했을까 늘 궁금하게 생각되었습니다. 예전에는 그가 왕에게 할 말을 달라고 또는 그 지혜를 달라고 기도했을 거라고 막연히 생각했는데 요즘은 생각이 조금 달라졌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에 계속 있었다면 하나님께서 그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이라는 것은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일을 행할 하나님의 때를 기다렸겠지요. 그리고 왕이 그렇게 물었을 때 그의 심중에 있는 말을 하기 전에  이 때가 하나님의 때인지 확인하고 만일 하나님의 때라면 왕의 마음을 만져 달라고 기도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야기가 딴대로 흘렀는데 같은 맥락으로 만나는 사람의 마음을, 환경을 온전히 성령님께서 주장하여 주시기를 기도함도 중요한 것 같습니다. 늘 영혼사랑에 대한 마음이 있으면 때에 따라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함이 가장 쉬운 전도의 방법임은 확실합니다. 




사마리아 여인과 삭개오의 예를 든 것은 개인적으로는 조금 아쉬움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의 마음을 열기 위해 그리고 삭개오의 마음을 열기 위해 그렇게 하셨다고는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에게 남편이 없음을 그리고 세리장이었던 삭개오가 그 자신의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해 뽕나무에 올라갔던 그 마음을 예수님은  직설적으로 이야기 하셨으니까요.(  당시 뽕나무에 올라가는 것은 주로 목자들이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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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윤기님의 댓글

백윤기 작성일

댓글에 감사드립니다.


특히 summer 님과 이진원 님의 댓글을 잘 읽었습니다.


차근차근 정성스레 쓰셨고 귀한 마음이 담겨있는 댓글이라 제가 뭐라 감히 토를 달겠습니까...


전도방식으로서의 소통과 호통의 옳고 그름은 옆에 제쳐놓고, 이렇게 우리가 소통 할 수 있다는 것이 우선 흐믓합니다.




오늘 밤에 New Vision 교회에서 시작한 Family Conference 에서 시애틀 형제교회의 권준목사님께서 다음과 같은 실화를 말씀하시더군요.




몇달전 시애틀 형제교회에서 조선족 교회의 목회자 부부 40명을 북경에 초대하여  그분들의 노고를 위로하는 2박3일의 피정을 가졌다합니다. 마지막날 세족식을 하는데 어느 조선족 목사님이 참회를 하며 간증을 하셨습니다.


부인의 발을 씻어주려니 갑자기 몇년전 눈이 쌓인 길가로 맨발로 도망나가던 부인의 발이 생각났다합니다.


 이 목사님은 부인을  자주구타하였다합니다. 그 이유는 자기가 정말 열심히 전도와 교회를 섬기는 사역을 부지런히 하는데 부인의 나태함이 자꾸 보여서 자기의 사역에 걸림돌이 되는 것이 정말 싫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열심이 덜한 이 부인을 때려서 영적으로 인도하려하였다합니다.


그리고, 아이들이 자기를 보면 슬슬피하는 것은 부인이 자녀교육도 잘 못하여 집이 이모양이 되었다고 울분이 나서 더욱 때려주었다합니다.


그러면서도 한번도 부인을 구타하는 것에대한 죄책감을 가진 적이 없다합니다. 왜냐면,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하는 자신에게 걸림돌이 되는 부인을 바른 길로 인도할 사명이 자기에게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랍니다.




이청준 작가의 "당신들의 천국" 이 떠오릅니다...




소통으로 전도를 하던 호통으로 전도를 하던, 그 밑에 있는 가장 basic 은 대상을 향한 사랑과 배려하는 마음인 것 같습니다. 그런 맘이 결여된 전도와 선교는 "당신들의 천국"이 되버릴 수 밖에 없는 것이겠지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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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eyoung Kim님의 댓글

Jeeyoung Kim 작성일

어렸을 때, 큰 길거리에서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을 회치던 최권능 목사님 이야기를 들으며 은혜를 받았었습니다.  하도 크게 소리를 쳐서 일본 순사가 말에서 떨어졌다죠? 하지만, 그 당시는 크리스챤들이 경외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들이 있는 곳에는 탐관오리들이 자취를 감췄고, 술집이 문을 닫았답니다. 우리가 복음을 크게 증거할 열정이 있다면, 먼저 나 자신이 증인의 모습(자기가 증거하는 것을 삶에서 구현하고 있는)을 하고 있는지 살펴보는 것은  기본일 것입니다. 우리의 기독교가 지금 예수의 증인의 모습인지 점검해보는 자세가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 드네요. 증인이 아닌 사람들의 증거행위는 아무래도 별로 도움이 안 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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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mmer님의 댓글

Summer 작성일

댓글들을 읽으며 너무 감사했습니다. ^^


저희가 호통이든 소통이든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주님을 위해 전도하고 선교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또한 Jeeyong kim 자매님이 말씀하신것 처럼 제가 증인의 삶을 살고있는지 정검하며 나 자신 먼저 돌아보는 것도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되네요.^^  증인의 삶이 없는 전도? .....ㅠㅠ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