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펌] 기독교 사상 인터뷰 - 나의 설교를 말한다. 임영수 목사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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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2,508회 작성일 12-04-11 2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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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사상 [나의 설교를 말한다/모새골 공동체 임영수 목사]
인터뷰어/ 지강유철, 한종호 편집주간
“저자세 고자세 아닌 정자세로.” 오래전 한 중견 언론인이 발표한 칼럼 제목이다. 칼럼 내용을 잊은 지 오래지만 그가 던진 비굴이 아닌 겸손, 교만이 아닌 정자세에 대한 물음은 지난 10여 년 동안 내 일상의 화두 중 하나였다. 한국교회로부터 ‘정자세’를 배우지 못했기 때문일 테다. 그 때문인지, 대다수 크리스천들은 저자세와 고자세를 시계추처럼 왔다 갔다 하기를 반복할 뿐 어떤 상황에서 자신이 취해야 할 정자세가 무엇인지에 대해선 별관심도 고민도 없는 듯하다. 임영수 목사는 크리스천으로서 우리가 취해야 할 ‘정자세’가 어떤 것인지를 생각하게 만드는 설교자다. 군사정권 치하에서 영락교회를 담임하고 있던 임영수 목사의 목회 스트레스 절반은 좌와 우의 문제, 특히 안기부에 끌려가는 대학생문제였다. 당시 좌나 우가 아닌 제3의 길을 선택한 그의 결심을 임영수 목사 나름의 ‘정자세’에 대한 고민의 흔적으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 그의 목회와 삶을 주목하게 만드는 또 다른 ‘정자세’는, “하나님에 대해 열리고, 하나님에 대한 왜곡이 수정되어 객관적인 하나님 이해에 도달해야 한다는” 견고한 확신이다. 설교와 하나님에 대한 임영수 목사의 확신은 “자신이 생각하는 영적 실재란 성삼위 하나님이고, 평생 목사로 살면서 얻은 현재와 미래를 다 포괄하는 부활의 소망이란 결론” 위에 모새골을 세운 실천으로 우뚝하다. 대다수 설교자들이 낡은 과거 시대의 유물로 내다버린 하나님 중심주의, 영성, 그리고 전통적인 설교에 대한 확신 위에서 오늘의 설교를 구축하기 때문인지 임영수 목사의 설교는 아다지오 템포로 느릿하게 흐른다. 그의 모국어에서 한경직 목사의 얼굴이 어른거리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젊은이들까지 그의 설교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1941년생이라는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유진 피터슨이 사역(私譯)한 『메시지 신약』이 주일 아침 설교에서 울려 퍼지고, 최신버전의 스마트폰을 이용할 만큼 문화적으로도 고루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임영수 목사는 주기도나 사도신경 같은 우리 신앙의 영적 고갱이들을 모세나 베드로가 그랬던 것처럼 시대와 대상이 달라질 때마다 새롭게 설교하여 각각의 버전으로 출판하고 있다. 그의 설교가 영성적이라는 설교비평가들의 평가가 옳다면 나는 그 영성의 핵심을 하나님과 사람 사이, 설교자와 교인 사이, 그리고 시대와 말씀 사이에서 끊임없이 정자세를 모색해온 그의 구도자적 자세에서 찾는다. 이 인터뷰는 지난 4월 12일 오전 10시 경기도 양평군 강상면 송학리 모새골 공동체에서 2시간 동안 진행되었다.
한종호 정용섭 목사님의 설교 비평을 접하셨을 때 어떤 느낌을 받으셨는지요.
임영수 설교는 늘 해 왔지만 제 설교를 비평해 주는 분을 만나보지 못했습니다. 정용섭 목사님의 비평은 이제까지의 제 설교와 앞으로 가야할 방향에 대해 생각하고 정리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내면의 세계가 조금씩 계속 변모하기 때문인지 텀별로 설교 유형이 달라진다는 것은 느끼고 있었습니다. 처음 목회하던 평광교회를 사임하고 칼 융 연구소에 다녀왔습니다. 그 뒤 남대문교회에 있다가 영락교회로 갔습니다. 영락교회를 그만두고는 주님의교회에 잠깐 있다가 모새골로 들어왔습니다. 모새골 설교도 전반과 후반이 다르다는 것을 느낍니다. 전에 사용한 설교원고는 다시 사용하지 않는다는 원칙 때문에 설교 유형이 달라지는 것 같습니다.
한종호 목회시점을 기준으로 목사님의 설교가 어떻게 변천되었는지를 간략하게 짚어주실 수 있을까요?
임영수 초기 설교는 실존적인 면이랄까 내면의 갈등과 관련이 깊었습니다. 융 연구소를 다녀오고부터는 이해가 깊어지면서 좀 더 현실적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제 설교는 교회를 떠날 때 한계에 부딪쳤다가 다음 교회 목회의 새로운 것과 통합되었습니다. 예를 들자면 평강교회 시절의 설교를 버린 것이 아니고 남대문교회와 통합이 된 것입니다. 기독교윤리적인 면에 치우쳤던 초창기 설교는 융을 탐독해가면서는 인간이해로 관심이 바뀌더군요. 기독교윤리를 버린 것이 아니고 윤리와 인간이해가 어우러지게 된 것입니다. 영락교회 때는 영성에 관심이 생기면서 저의 내면에서 기독교윤리와 분석심리학이 새롭게 통합 된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문제해결을 많이 얻은 거죠. 모새골을 시작하면서부터는 한계에 부딪쳐서 부서지고 새롭게 통합되는 것이 거의 없어지게 되더군요.
한종호 기도란 영적인 실재에 대해서 촉수를 내미는 것이라는 말씀을 하셨는데요. 저는 설교 또한 영적인 실재를 향해서 촉수를 내미는 것이라 해도 무방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말씀 속에 목사님의 설교론이 담겨있다고 봐도 될까요?
임영수 그렇게 생각하셔도 괜찮습니다. 설교를 들을 때 자꾸 하나님에 대해 열리고, 하나님에 대하여 왜곡된 것들이 수정되어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할 때 개인적인 욕망이나 기대와 함께 기대에 맞는 하나님을 갖게 되잖아요. 그런 하나님을 믿겠다고 자꾸 자기 암시를 합니다. 이렇게 되면 신앙이 강박관념이나 자기 암시가 될 수 있어요. 그러나 설교를 통해서 왜곡된 하나님상이 바로 잡히면서 자기암시나 강박관념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신앙이란 하나님에 대한 바른 이해에서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바른 설교는 왜곡된 하나님상으로부터 벗어나서 객관적인 하나님을 이해하게 합니다. 그래야 그 분에 대한 신뢰가 생기거든요. 그렇게 본다면 설교는 하나님을 향해 바른 촉수를 내미는 것이라 볼 수 있겠지요.
한종호 사람들은 대상을 지적인 면, 정적인 면, 의지적인 면을 통해서 경험하게 되는데요. 촉수를 내민다고 하신 말씀의 의미는 새롭게 다가선다는 뜻인가요, 아니면 그리스도인의 인식론적인 차원을 말씀하신 것인가요?
임영수 비유하자면 강에는 지성적인 수로(水路)가 있고, 지성을 초월한 직관적인 수로가 있습니다. 신앙은 지성적인 수로와 직관적인 수로가 함께 작용을 합니다. 지식이 올바르지 못할 때는 신앙이 바로서지 못하는 것이지요. 설교는 직관적인 면과 지성적인 면을 다 겸비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이성적으로 바르게 이해해야 하고, 그 지식은 영적 수로를 통해서 경험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통합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너무 지성주의로 나가 영적인 수로가 닫히면 설교가 실존적인 불안과 삶의 얽힌 부분에서 해방될 수 없잖아요. 그래서 신앙을 어떻게 경험하느냐 하는 문제엔 델리케이트한 부분이 있지요. 이 문제는 목회자가 어떤 퍼스낼리티로 성장하며 설교하느냐와 밀접한 관련을 갖습니다.
한종호 한국교회에서도 영적이라는 말 또는 영성이라는 말이 회자되고, 열광주의니 기복주의니 하는 주술적인 표현도 영성과 연관되어 사용되고 있습니다. 영성에서 감성적인 차원이 강조된다는 뜻이겠지요. 목사님께서는 영적인 실재가 무엇이라 생각하시는지요.
임영수 제가 이야기하는 영적 실재, 즉 영적 리얼리티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말합니다. 육체와 육체 이면에 숨어 있는 혼을 말하는 게 아니지요. 매일 살면서 일용할 양식과 건강이 다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알고,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영적인 것입니다. 돈을 많이 벌고, 사회적으로 지위가 높다 하더라도 하나님 없이 세속의 수평적인 관계 속에서만 살고 있다면 육적인 사람이라 말할 수 있겠지요. 이것이 제가 말하는 영적이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한종호 목사님의 설교와 영성을 구성하고 있는 중요한 두 가지 요소는 신학과 칼 융의 심리학인 것 같습니다. 인간의 무의식을 신학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목사님에게 신학과 심리학의 관계는 어떤 것입니까.
임영수 융 연구소에 갔을 때 당신은 왜 여기에 왔느냐고 물어서 세 가지 이야기를 했습니다. 나는 기계를 다루는 사람이 아니고 늘 인간관계 속에서 사는 사람이기 때문에 죄나 타락을 포함한 그 어떤 전제도 없이 인간을 리얼하게 보는 것이 중요한데 융의 테오리(theorie)가 목회자에게 상당한 인스트러먼트(instrument)가 된다고 했습니다. 다음으로 목사는 가면을 쓰고 자기 합리화를 하기 쉬운데 융을 공부함으로 자기 합리화와 책임전가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세 번째로는 하나님 앞에서 성숙된 인격이 되기 위해 자신을 보다 바르게 이해하고 분석하는데 융이 좋은 도구가 될 수 있다고 생각이 들어 융 연구소를 지원했다고 했습니다. 영적인 문제를 다루는데 있어서 심리학뿐만 아니라 사회과학은 좋은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융에 의하면 사람들은 평생 자기를 소외시키고, 거짓 자아나 남의 칭찬, 그리고 세속적인 가치와 자기를 동일화시키며 살아갑니다. 진정한 자아를 자꾸 소외시키고, 무의식 속에 가두어놓고는 돌보지 않지요. 그러면 죽음에 임박했을 때 자기가 소외시킨 진정한 자아가 무서운 괴물로 나타나서 보상을 요구한다는 것입니다. 융은 또한 인간이 죽은 이후에도 인간의 캐릭터는 계속 살아 있다는 이야기도 했습니다. 인간의 캐릭터가 죽음으로도 소멸되지 않는다는 이야기는 목사인 내게 왜 평생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자기와 일치 속에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상당한 인사이트를 주었습니다. 이러한 인간 이해 없이 예수 믿으면 잘 되고, 복 받고, 사회적으로 출세한다고 설교하는 것은 자꾸 거짓된 자아상을 자극하고 심어주는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 하나님은 우리가 찾는 리얼 셀프의 원형이라 할 수 있단 말예요. 그런데 교회에서는 자꾸 복 받는다 어쩐다 하면서 하나님을 못 만나게 합니다. 그래서 예수를 오래 믿어도 자기 문제에서 헤어 나오질 못합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이 불가능해지는 거죠. 하나님과 함께 하면 물리학을 하면서도 신앙의 폭과 깊이가 넓어질 수 있습니다. 물리학이 신앙을 파괴하는 것이 아닙니다. 심리학은 그런 면에서 제게 도움이 되었습니다. 지금은 융의 책을 거의 읽지 않지만 그를 만난 것은 제 생애에 상당히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신학도로서 기초 심리학이나 사회학, 철학적인 인간이해 등을 통해 얻는 인사이트는 상당히 중요합니다. 물론 심리학을 하나님의 자리에 앉혀놓고 그것을 복음인 것처럼 우려먹으면 안 되겠지요. 저는 융을 읽어갈수록 인간 문제를 깊게 분석하고 정직하게 들여다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융의 심리학에는 의미와 희망과 가치를 하나로 묶어서 인간을 이끌어주는 힘은 없지요. 인간을 집요하게 붙잡고 있는 것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한 분석은 되는데 그 힘에서 풀려나게는 못 하는 겁니다. 그리스도와 복음만이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의 자리에 융이 앉아있으면 안 됩니다. 이 점을 바르게 이해해야 합니다. 상당히 중요한 문제이거든요.
한종호 『심리학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라는 책은 인간의 종교적 심리에 근거하는 목회와 설교자의 문제점을 지적했는데요. 실제로 매우 현대적이고 세련된 교회 중에서 뉴에지이와 같은 특징을 보이는 교회가 한국에 적지 않습니다. ‘경배와 찬양’이라는 열린 예배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원에 집중하기 보다는 예배 참여자들의 감성과 심리 만족에 집중되는 경향이 많습니다.
임영수 모세골은 목회자에게 도움이 될까 해서 인턴십 과정을 설치했습니다. 참여하는 목회자들은 대개 연령층에 따라 반응이 다릅니다. 나이 드신 목사님들은, "목사님, 은퇴하고 이거 하시는데 얼마 들었습니까?"라고 묻습니다. 중견 목회자들은 "제가 영성목회를 하려고 하는데 프로그램 좀 주세요" 라고 하죠. 젊은 목회자들은 "안수 받고 목사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방황했는데 여기에 와서 방향을 잡았습니다.“라는 이야길 합니다. 첫 번째 유형으로 계속 나가게 되면 심리학에 소금 절인 복음을 이야기하지는 않을 겁니다. 하지만 두 번째 유형의 목회자들은 유혹에 빠지기 쉬워요. 자기 실천은 못하더라도 잘 웃게 만들고 사람을 많이 모이게 하면 뭐라도 공급할 수 있다고 생각하잖아요. 복음이 배추처럼 심리학에 절여지면 안 됩니다. 심리학을 도구로 쓸 수는 있습니다. 저는 20대 때에 세상 그 어떤 것으로도 충족되지 않는 내면의 깊은 그리움과 동경이 있었거든요. 성(性)으로도, 먹는 것으로도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그걸 몰랐는데 신학을 하고 융을 읽으면서 저의 내면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런 그리움과 동경은 하나님과 교제하지 않고는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만약 제가 영혼을 향한 그리움을 몰랐다면 그걸 상쇄시키기 위해 술을 많이 했거나 여성편력을 보였을지 누가 알겠습니까. 심리학에서 말하는 내면 깊은 곳에서의 영원에 대한 욕구는 성경도 이야기하잖아요. 그런 것들을 심리학에 절여진 복음이라고 말할 순 없겠죠. 두 번째 유형의 목사님들이 영성목회 프로그램을 달라고 하면 "영성 목회 하려면 당신이 지금까지 살아온 목사의 라이프 스타일을 바꾸라”는 말을 해줍니다. 큰 교회의 성공한 목사, 빌딩 짓고 사업 크게 하는 소위 두 날개 목회를 본받으려 하지 말고 매일 거짓 없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배워 가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설교도 성경 공부도 자연스럽게 바뀌게 되거든요. 그렇지 않으면 영성 프로그램이 설교자를 만들어내는 기계가 될 수 있습니다. 목사로서 허구에 빠져들게 되고, 강단에서 말하는 것과는 엉뚱한 생활을 할 수 있다는 이야기도 해 줍니다. 프로그램으로는 영성 목회가 안 된다는 점을 분명히 하는 겁니다. 영성 목회의 시금석은 정직하게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삶을 배우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에 따라 좌우됩니다. 인기 있는 설교를 만들어 내려는 욕망으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한국교회의 심각한 문제는 카타르시스와 영적해방의 의미를 구분하지 못하는 겁니다. 예를 들어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이 노동자로 살기 때문에 성경공부와 영적 훈련을 받을 수 없어서 매주 금요일 저녁마다 교회에 가서 새벽 4시까지 커피로 잠을 쫓으며 열심히 기도를 합니다. 그런데 깊이 있는 기도는 못하고 찬양과 통성기도를 통해 카타르시스만 느끼고 돌아옵니다. 그 약발로 일주일을 산단 말이죠. 그거 없이는 못 살 것 같다고 하지만 그 체험 속에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은 없거든요. 내면에 숨겨진 깊은 문제를 하나님 앞에 내어놓는 쪽으로 철야기도가 촉수를 내밀어야 하는데 그렇게는 안 하고 자꾸 볼륨만 높입니다. 알아들을 수 없는 설교로 흥분시키면서 말입니다. 요즘 목회자들이 빠질 수 있는 유혹이 그런 것이거든요. 인간적인 초조, 빨리 성공하려고 하는 우상 등이 심리학에 물든 기독교로 변질시킵니다. 그러나 심리학만이 아니라 다른 것과 짬뽕된 복음도 많지요. 이데올로기나 투쟁의 이분법으로만 세상을 보게 만들면서 그게 복음의 인사이트인 것처럼 가르치기도 합니다. 내면은 항상 공허와 적대감에 시달리는데 말입니다.
지강유철 목사님의 요즘 설교문은 속도를 내서 읽을 수가 없습니다. 읽어 내려가다 자꾸 멈추게 됩니다. 쉼표도 음악의 일부인데요. 목사님의 설교원고는 쉼표가 많은 악보처럼 여백이 큽니다. 설교준비를 하거나 원고 작성을 하실 때 글을 쓰는 속도를 의식한 적이 있는지요?
임영수 제가 신학교를 졸업하고 교목과 신학교 교수와, 부목사와 담임목사를 거치며 외형적인 사역이 몇 번 바뀌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이면에는 일관되었지만. 구도자적인 삶이었는데, 교목에서 다음 사역으로 넘어간 것은 보이지 않는 이면의 세계에서 내면의 변화가 그걸 가능하게 만들던 것 같습니다. 부서지고, 통합되고 또 새롭게 통합이 되면서 모새골이라는 결론에 도달한 것입니다. 지금 하는 저의 설교는 제 내면에서 상당히 많은 것들이 통합되었을 테니 단어나 문장이 단순할 순 없겠죠.
지강유철 목사님은 좌우명에서 뿐 아니라 좋은 설교의 기준으로도 정직을 꼽고 계십니다. 목사님께서 생각하시는 정직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임영수 돈 꿔주고 안 갚는다던지, 거짓말을 안 한다던지 하는 윤리적 의미에서 정직을 이야기하는 게 아닙니다. 제가 말하는 정직은 그것을 넘어섭니다. 하나님 앞에서 거짓된 합리화를 하지 않는 것이 정직입니다. 언제나 있는 그대로를 내 보일 수 있어야 그게 정직입니다. 저는 살아오면서 점점 없어집니다. 나를 감추려던 수식어들도 많이 없어졌습니다. 그만큼 주변의 시선과 명예로부터 자유로워진 것이겠죠.
지강유철 영성에 대해 목사님께서 좋아하시는 모차르트를 통해 질문 드려보겠습니다. 모차르트는 영감을 받아서 단숨에 곡을 써내려갔습니다. 고친 흔적이 거의 보이지 않지요. 그러나 남아있는 원본 악보가 증명하듯 베토벤은 수도 없이 고치고 또 고치고 나서야 한 곡을 완성했습니다. 목사님께서는 설교원고를 쓰실 때 모차르트처럼 영감을 받아 써내려가시나요, 아니면 베토벤처럼 고치고, 숙고에 숙고를 거듭하며 설교문을 완성하시나요?
임영수 그 다음 주가 부활주일인데요. 2주 동안 어떤 영감이 떠올랐다면, 그러니까 눈에 보이지 않지만 눈에 보이는 것보다 더 실재하는 세계에 대해 눈을 뜨게 하는 것이 부활이라는 영감을 얻었다면 그 영감을 많이 묵상하고 설교를 완성합니다. 그 흐름 자체가 영감이라 할 수 있겠지요.
한종호 목사님 설교를 하나의 카테고리에 가두는 게 그렇지만 영성 설교라는 성격이 강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설교와 영성의 관계는 어떠해야 하나요.
임영수 설교와 영성의 관계는 목사로서 매일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을 계속 배워가는 것 아니겠습니까. 저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또 하루를 주신 것을 감사하면서, “제가 오늘 아침에 <기독교사상>에 계신 분들을 만납니다. 주님과 더불어 만남의 시간을 갖겠습니다.”'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이처럼 하루를 하나님과 함께 살게 될 때는 적은 것이라도 다 의미 있게 받아들여집니다. 일본의 쓰나미 사건도 우리에게 무의미하지 않습니다. 영성적인 설교를 한다는 것은 하나님과 함께 일상적인 삶을 살아가는 과정에서 어떤 문제를 보고 이해하고 이야기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예를 들어 일본의 쓰나미 사건의 경우, “일본은 하나님을 믿지 않고 귀신을 많이 섬긴 나라여서 하나님이 벌을 줬다”고 교리적으로 말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쓰나미나 원전사고는 일본이 또 한 번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방식을 새롭게 바꿀 수 있는, 새로운 세계로 들어갈 수 있는 상당히 강력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 보여집니다. 그것을 일본 사람들이 들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만약 그들이 못 듣게 된다면 과거 방식 그대로 자기의 역사를 만들어갈 텐데, 그렇게 된다면 희망이 없을 것 같습니다. 사건 속에서 느끼고 내가 본 관점으로 설교하는 게 영성과 관련된 설교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한종호 일본의 쓰나미나 원전 사건을 계기로 삶의 전환점을 갖는 강렬한 메시지를 들을 수 있어야 한다고 하는 것이 바로 목사님이 자주 말씀하시는 '내면의 빛'이라 알고 있습니다. 그 내면의 빛이란 심층심리의 세계에서 경험되는 말씀인지, 아니면 신비주의 영성가들이 말하는 영성과 비슷한 것인지요? 기독교 전통은 내면의 빛보다는 말씀과 성만찬의 영성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것들이 형식화되고 주술화되는 건 문제이지만 그것의 깊이를 안다면 참된 내면의 빛을 경험할 수 있지 않을까요. 목사님의 말씀하시는 내면의 빛은 심리적인 경험인가요, 아니면 신학적인 경험인가요?
임영수 인간존재 속에는 빛이 없잖아요? 어두움이지요. 그 어둠은 좌절, 무의미, 목마름…등인데요. 하나님은 빛이고, 생명이고, 말씀 그 자체시니까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우리를 만나 주시고 우리와 관계를 지으십니다. 오늘도 우리가 하나님의 빛 가운데서 이 하루를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그 빛이 있기 때문에 감추어진 것이 드러나게 되고 일본의 자연재해의 의미와 같은 메시지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제가 말하는 빛은 인간이 본래부터 갖고 있었던 게 아니라 하나님 자신을 말합니다. 그분의 말씀을 묵상할 때 우리 모순이 자꾸 드러나고, 어두움과 거짓이 드러나고, 그래서 그런 것들이 수정되어 정직한 삶을 살게 되는 겁니다. 설교로 감동만 시키려 하지 말고 하나님의 빛 가운데 서게 해야 합니다. 독일 다름슈타트에 가면 마리아 자매회가 있습니다. 이곳은 한 달에 한 번씩 빛 가운데서 걷는 시간이 있습니다. 외부사람 절대 못 들어오게 하고 수녀들이 바실리아 슈링크를 중심으로 저녁 시간에 모여서 그동안 토해내지 못하던 서로 불편하던 관계를 다 이야기합니다. 밖에 나가서는 일체 발설하지 않습니다. 그 시간은 어두움을 다 토해내는 시간입니다. 제가 말한 빛은 이런 겁니다.
한종호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빛을 경험한 사람들이 타자를 위한 삶을 위해 지평을 넓혀갈 수 있을까요.
임영수 그 빛은 우리 삶의 지평을 넓혀주고, 자아 중심의 삶에서 벗어나 자기를 초월한 삶을 살도록 해 주지요. 내가 지금 다가가야 할 사람, 도와주어야 할 사람이 누구인가 보게 하지요. 자기 모순적인 삶을 넘어서게 하고 극복하게 하기도 합니다. 빛이 없으면 어떻게 살겠습니까. 묵상을 해보면, 결국 묵상은 빛입니다. 번뜩 깨닫게 하고, 어떤 때는 희열을 얻게 하고, 어떤 때는 박수를 치며 감사하게도 합니다.
지강유철 훌륭한 지휘자들 중에는 평생 베토벤의 9개의 교향곡을 두세 번 음반으로 내는 경우는 흔합니다. 모세도 그랬지만 베드로도 죽음이 가까워오자 한 번 이미 서 있는 진리 위에 더 견고하게 서도록 중요한 문제들을 가지고 다시 설교했습니다. 한국교회 설교자들은 목사님처럼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주기도 등으로 두 권의 책으로 내는 경우를 거의 보지 못했습니다. 앞으로 기회가 된다면 주기도문 설교를 또 하고 싶다는 말씀도 하셨는데요. 이렇게 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임영수 제 글의 표현력을 높이기 위해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영락교회 있을 때 특별새벽기도 시간에 주기도 설교를 했습니다. 영락교회라는 특수한 상황, 그리고 그때만 해도 완전히 민주화가 되지 않은 상황에서 주기도를 묵상한 것입니다. 그 이후 우리 사회가 민주화 되었지만 제 이면의 세계도 깊고 폭이 넓어졌습니다. 그래서 다시 주기도를 읽는 가운데 그 전에 미처 보지 못했던 면을 많이 드러내는 주기도 설교를 주님의교회에서 했습니다. 지금 주기도를 설교한다면 두 번째 설교와 굉장히 다른 내용이 될 것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어떤 상황에서 10년이나 5년 전에 드러낸 부분이 지금 시점에서 똑같을 수는 없을 겁니다. 말씀의 함축성 때문이지요. 주기도로 두 권을 책을 낸 것을 보면 제 영적 삶이 퇴보한 것은 아니란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에 대한 좀 더 새로운 이해로 발전하고 있다는 점을 어느 정도 감지합니다. 딸이 오르간을 전공했는데요. 예를 들어 모차르트의 대관식 미사를 첫 번 독주회 때 했는데 문학과 인문서적을 많이 읽고, 아이도 낳고 인생을 살다가 다시 그 곡을 연주한다면 다른 연주가 되겠지요. 설교도 마찬가지입니다. 10년 전에 설교한 내용을 지금 하나도 고칠 게 없다면 두 가지 중 하나일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을 완벽하게 드러냈던지, 아니면 10년 전 바로 그 위치에 지금도 머물러 있던지!
한종호 목사님은 영락교회라는 라는 컨텍스트에서 주기도를 설교했습니다. 민주화가 덜 된 시대적 상황이었고, 목사님의 경험의 깊이와 폭이 영향을 끼쳤을 것입니다. 목사님께서는 파스칼을 언급하시면서 성경은 성경으로 하여금 풀리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시대에는 텍스트를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드러낼 수 있을까요?
임영수 목회자가 정직하게 하나님 앞에서 지성과 영성을 통합하여 영적으로 계속 성숙되어 가는 길밖에 다른 길은 없습니다.
지강유철 경건과 관련한 시대문제를 여쭙고 싶습니다. 목사님은 터가 무너지는 위기의 때에 크리스천의 경건은 도피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6.29를 비롯한 당시의 민주화 시절에 목사님은 설교에서 시대적인 문제들을 종종 언급하셨지요. 그런데 요즘 설교에서는 시대나 역사 문제에 대한 언급을 거의 볼 수가 없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는지 듣고 싶습니다. 덧붙여서 민족의 위기 때에 그리스도인들이 경건으로 그 시대 속에 선다는 것이 어떻게 행동하는 것인지에 대해서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임영수 제가 유신 말기 때 대학생 지도 목사였습니다. 학생들이 자꾸 안기부에 잡혀가서 데리고 나오기를 여러 번 했습니다. 그 이후 담임목사가 되었고, 나름대로 고민이 깊었습니다. 왼쪽을 들여다보면서 거기도 거짓과 동의되지 않는 면이 너무 많아 몸을 담을 수가 없었습니다. 오른쪽도 크게 다르지 않아서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가 없었습니다. 동기생인 김진홍 목사는 신학교 졸업반 때 성명을 낸다며 제게 참여하라고 했습니다. 의도했던 건 아니지만 저는 다른 일 때문에 참여를 못했습니다. 신학을 하면서부터 그런 갈등이 제 내면에 있었습니다. 그러다 저는 둘 중 하나가 아니라 제3의 길을 가야겠다고 작정했습니다. 그래서 설교의 초점을 제3의 길에 맞췄습니다. 영락교회 있을 때 김영삼 대통령이 당선되어 민주화에 큰 진전이 있었습니다. 목회 스트레스의 반이 없어지더군요.(웃음) 그때까지는 목회 스트레스가 교회 구조 속에서 나온 게 아니라 사회에서 나왔던 것입니다. 민주화가 되고 나니 잠도 잘 오고 긍지도 생기더군요. 지금 제가 전하는 설교의 모든 내용은 오늘 우리 시대의 문제에 대해 하나하나의 정확한 답변은 안 됩니다만 시대의 문제를 능히 다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요즘은 거의 신문을 보지 않습니다. 우리 집에는 텔레비전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근본적인 문제들에 대해 예전보다 더 밝게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참 신기합니다. 그래서 더 진솔한 본질을 이야기해야겠다는 마음을 먹게 되나 봅니다.
한종호 김진홍 목사님과 같은 클래스에서 공부하셨군요. 본지에서 노무현 대통령 서거 때 김진홍 목사님의 발언을 다룬 적이 있습니다. 김 목사님은 뉴라이트 쪽에 있으면서 이명박 대통령 당선에 지대한 공헌을 하셨고, 노 전 대통령 서거 때는 칼럼을 통해 죽음을 굉장히 희화화하셨습니다. 빈민목회를 하고 민중운동을 하셨던 분이 어떻게 미국에 줄을 잘서야 한다는 이야기를 할 수 있는지에 대해 매우 안타까워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한 목회자의 신앙 및 신학적인 변화는 왜 나타나는 것일까요?
임영수 신학교 2학년 때인가 김진홍 목사는 송정도 마을에 들어가서 활빈교회를 세웠고 거기서 결혼도 했습니다. 상당히 왼쪽으로 가셨었지요. 그러나 감옥에 들어가서 성경을 읽고 성령 체험을 많이 하면서 왼쪽의 허구성을 발견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계속 민중 운동가로 영글 수 있었겠지요. 또 한 가지는 그 분이 북한에 가서 두레운동하면서 북한의 실상을 보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김대중이나 노무현 정부 때만 해도 민주화 운동을 한 분들의 몫을 인정해줘야 한다는 이야기를 했었습니다. 그 이후엔 급변했지요. 이유는 그 분이 북한이나 레프트 쪽의 허구적인 것들을 많이 보면서 위기의식을 느꼈던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지강유철 목사님은 예언자들이 당대 정치를 향해 제도나 헌법을 바꾸라고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외쳤다고 하셨습니다. 교회나 선지자는 그런 태도와 메시지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역사 속에서 그리스도인 개인들은 노예제도를 폐지하는 법안을 통과시키고, 여성 차별을 종식시키고, 약자를 보호하는 법안을 통과시키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였는데요.
임영수 제 경험으로는 복음이 변질만 안 되면 복음 안에 모든 요소들이 다 들어있습니다. 진지하게 하나님을 이해해가고 깨달아가기 시작하면 예언자적인 사명과 제사장적인 사명을 구태여 구분할 이유가 없지요. 복음의 본질로 통합된 인격을 가진 개인이나 공동체라면 어떤 정권에 대해서도 어두운 면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정권도 밝음만 있지는 않잖아요. 한 정권의 어둠에 동조할 수 없는 게 분명하다면 이야기할 수밖에 없겠지요. 하지만 교회가 너무 예언자적인 기능만 하려고 하면 투쟁일변도가 되어서 하나님과 관계가 단절되는 모순에 빠질 수 있습니다. 제가 프린스턴에 있을 때 칠레 해방 운동가인 구티에레즈가 와 있었어요. 키가 작은 분이었는데 3개월 동안 머물면서 특강을 했지요. 페레스트로이카가 되고 2년째 되던 해였습니다. 당시 이상윤 박사가 구티에레즈에게 “이제는 당신의 신학이 필요 없게 됐다”고 했어요. 그랬더니 “제가 그 때를 고대하고 있었습니다.”라고 하더군요. “내 신학이 끝나는 시대가 오길 기도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이 사람이 정말 하나님을 바르게 믿는 신학자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학생들을 지도할 때 제일 위험스러운 건 기본적인 본질을 놓치게 되면 네오마르크시즘에 완전히 먹힘을 당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노예화가 된다는 얘깁니다. 당시 젊은 대학생 가운데는 북한 체재를 믿고 수령님을 어버이라고도 했어요. 저는 당시 대학생들이 생을 망가뜨릴 만큼 위험에 빠지지 않도록 하는 일에 역점을 두었었습니다. 본회퍼의 『신도의 공동생활』을 읽어보면 상당히 구체적으로 영성생활과 훈련을 많이 강조합니다. 지금 동독에 있는 조그만 신학교에서 본 훼퍼는 기숙사를 만들어 학생들이 철저히 자기 방과 침대를 청소하는 경건 훈련을 시켰습니다. 사실 본회퍼적인 사회적 저항의 방식은 쉽게 익힐 수 있지만 본회퍼 내면의 세계에 있었던 복음적인 영성은 하루 이틀 학습으로 얻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저는 본회퍼 저항 이전의 복음적 영성을 학생들에게 이야기해주려고 많이 노력했습니다. 너를 잃어버리면 나라도 잃어버리게 된다는 사실을 강조한 것입니다.
한종호 신학이란 시대적인 산물 아니겠습니까. 본회퍼의 저항의식 이전에 있었던 복음의 힘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요. 목사님은 목회자가 잃지 말아야 할 신학적인 토대가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임영수 그건 신학교육에서부터 이루어 져야 하는데 삶과 신학이 유리되지 않는 게 중요합니다. 그래서 영성이 필요합니다. 히틀러가 위대한 독일을 발표했을 때 독일 국가교회 목회자들은 대부분 동조했어요. 그런데 본회퍼는 NO!라고 했지요. 중요한 것은 본 훼퍼가 주체사상이나 칼 마르크스의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복음으로 그 시대를 보았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문제는 이데올로기로 시대를 보면서 본회퍼 흉내를 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예전에 지도자들이 젊은이들을 그렇게 오도하면 안 된다는 것을 많이 강조했습니다.
한종호 요즘 소위 스타 설교자들이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 전체는 동력을 많이 잃고 있습니다. 이유와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임영수 교회의 퇴락은 전 세계적인 현상입니다. 기독교뿐 아니라 오래된 종교가 다 퇴락하고 있습니다. 한스 큉이 은퇴할 때 21세기에 들어서면 모든 기성 종교는 다 문을 닫는다고 했어요. 하지만 인간 내면에 종교심은 불타오른다고 했지요. 그 전에 몰트만이 은퇴할 때 21세기에 독일국가교회가 어떻게 되겠냐고 학생들이 물으니 다 문을 닫는다고 했어요. 학생들이 깜짝 놀라자 몰트만은 “자네들이 21세기 들어가서 새 교회를 만들면 된다”고 했지요. 한국교회의 수적 증가가 많이 정체되었지만 다른 나라에 비하면 아직은 왕성합니다. 그러나 내면으로 들어가 보면 상당한 공허감에 시달리는 걸 봅니다. 이럴 때 사회로부터 비난을 받는다고 해서 그걸 입막음하려고 프로그램과 사업을 많이 하면 안 됩니다. 교인이 줄더라도 정직해야 합니다. 오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핵심이 무엇이고, 기독교가 지향하는 본래 신앙이 뭔지 다시 생각하고 재해석해야 합니다. 한스 큉이 쓴 『그리스도교의 본질』은 2000년 기독교 역사의 흐름을 개울로 비유합니다. 물이 흘러들어오는 개울에는 온갖 쓰레기와 잡동사니로 가득 차 있다는 겁니다. 어떻게 이런 로마가톨릭이 무너지지 않고 2000년을 흘러왔겠는가라고 큉은 반문합니다. 그것은 시대마다 교회가 빛을 잃고 몰락을 거듭해왔지만 그 쓰레기 가득한 개울에 썩지 않는 한줄기 맑은 물이 끊어지지 않고 공급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한줄기 맑은 물은 예수의 영이지요. 제도가 아니라 예수의 영이 기독교의 맥을 이어오고 있다고 본 것입니다. 기독교가 아주 어둡고 타락했을 때 예수의 영은 성 프린시스코로 나타나고, 그 이후에는 테레사 같은 사람이 등장하고, 로마 대성당을 짓기 위해 속죄부를 팔자 루터가 일어섰습니다. 기독교가 사회적으로 커다란 죄악을 범하던 히틀러 치하에서는 본 훼퍼가 있었습니다. 어두운 시대 속에서도 기독교가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제도나 수가 아니라 소멸되지 않는 예수의 영이 맑은 샘물처럼 기독교 역사의 개울을 흐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즘 한국교회는 정직하지 못한 것 같아요. 교회의 한계를 빌딩을 높이 짓는 두 날개 목회로 극복하려고 하는데, 이런 방식으로는 사회적 문제를 극복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예수의 영이 회복되지 않습니다. 교회와 사회적인 무브먼트는 강해지고 커지는데 복음의 진솔한 면은 죽어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기독교의 위기를 목회자들이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칼 바르트의 『로마서 강해』는 이 세상 속에 야곱의 교회와 에서의 교회가 있는데, 야곱의 교회는 오시는 하나님 의도와 생각 속에 있지만 에서의 교회는 완전히 제도화된 교회라고 말합니다. 에서의 교회가 야곱의 교회로 탈바꿈 되어가지 않는 한 에서의 교회는 맛을 잃은 소금이 된다는 것입니다. 칼 바르트는 오늘날 교회가 썩었으니 새 시대의 교회나 교파를 만들자는 건 안 된다고 했어요. <기독교사상>이 낡은 보수그룹이란 낙인을 찍히지 않으려고 너무 의식화되거나 개혁을 부르짖지 않았으면 합니다. 본질을 갖고 있으면서 자유롭게 교회의 예언자적 사명과 제사장적 사명을 감당하면 좋겠습니다. 좌든 우든 우리 편인가 해서 몰려왔다가 자기들이 주장하는 내용과 다른 것도 있다는 것을 보아야 한단 말이죠. 그렇지 않으면 레프트 사이드를 대변하는 잡지가 되거나 라이트 사이드를 대변하는 잡지가 되겠지요. 앞으로 <기독교사상>은 군정시대보다도 입장을 정리해 나가는 것이 더 힘들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아부하지 않는 정직성이 중요합니다. 겉으로 보기엔 상당히 레프트 잡지 같은데 들어와 보고는 “여기에 진리가 있구나”, “진리를 바로 세워가고 있구나”라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보수 쪽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시대든 초월하는 것이 기독교 복음의 특징이잖아요. 그런 의미에선 기독교가 그 시대를 심판하는 것이지요. <기독교사상>이 오늘 우리 시대에선 그 전보다 다른 짐을 지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한종호 앞서 말씀하신 한스 큉의 이야기나 몰트만의 이야기, 그리고 제도로서의 교회와 교리로써의 신앙이 많이 퇴색이 되어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비콕스는 현대 사회로 돌아온 종교란 표현을 썼습니다. 예수의 영이 흐르는 신앙을 가지려면 삶의 자리에서 이런 것들을 인식하며 풀어가야 할까요.
임영수 모새골에서는 청년 대학생들을 배려해서 1년에 한 두 차례 인텐시브 과정을 하고 있습니다. 젊은이들이 종교 문제에 대해 무관심한 것 같지만 그렇지 않아요. 자기 책임을 더 잘 하려고 합니다. 이번에 연평도 사건 때 젊은 해병들의 태도를 보면 상당히 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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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장근숙님의 댓글
장근숙 작성일
백형제님 감사합니다
귀한 목사님의 말씀을 읽게 해주셔서!
좋은 얘기나 귀감이 될 만한 말은 얼마든지 지껄일 수 있지만
자신이 그 말씀대로 살지 않으면서 말만 하는 사람들이 많은 이 세상에서,
임 목사님은 자신이 입 밖으로 낸 말은 이미 그의 삶 속에서 실천되어 검증 받은 것들 임을 알기에
옷깃을 여미는 마음으로 그 분의 글을 대하게 됩니다
이 내용을 프린트해서 읽고 또 읽어 내 삶에 실천하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