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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아씨 인터뷰, 그리고 정호승 시인의 에세이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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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donkey
조회 3,064회 작성일 11-08-19 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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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백목사님이 보내오신 이민아 씨의 인터뷰 기사와 최근 제가 읽은 정호승 시인의 에세이 중에 하나를 소개해 드리려합니다.


이민아 씨는 한국의 대표 지성인 이어령 선생님의 딸이지요. 이혼, 아들의 죽음, 실명의 위기등을  신앙으로 극복한 극적인 삶을 살고 계신분입니다. 

지난번 우리교회 도서실에서 대출한 이어령 선생님의 책 "지성에서 영성으로" 를 읽으면서 그분의 딸에대한 극진한 사랑을 진하게 느껴보았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기로 한 것도 딸을 기쁘게 해 주기위한 동기라 하실 정도로...


그런데 이민아 씨는 아버지로 부터 청소년기에 못받은 사랑에 대한 보상심리로 스물두살되던해에  부모가 몹시 반대하는 결혼을 하고  이곳 북가주로 왔다합니다...

그 부모의 마음이 얼마나 절망했을런지, 그리고 그렇게 한 결혼이 결국은 파국이 났을때 그 부모님의 마음은 산산조각이 났을 겁니다.


나머지는 아래의 링크에서 읽으실 수 있습니다.


인터뷰 기사 읽기


정호승 시인은 널리 알려져 있는 분인데 저는 최근에야 이분의 글을 읽게 되었습니다.

에세이 중 하나를 발췌하였습니다.


오늘은 나 내일은 너


    지난 여름 나는 스웨덴의 공동묘지 두 군데를 '관광'했다.

    유명한 현대 건축가에 의해 설계된 광활하고아름다운 

    묘지였다.

 

    산 자들의 지척에 죽음이 있음을 온전히 이해한, 영혼이 

    깨인 건축가에 의해, 손 안댄 듯이 손 댄, 거룩하되 따사로운 

    공간이었다.

 

    고대서부터 이어져 온 하고많은 역사 유적들이 장엄하나 

    쓸쓸한 인간 한계를 확인 시키는 것과는 달리, 내게 그 

    공동묘지는 죽음의 힘으로 마침내 공평 무사해져서 평화를 

    되찾는 인간들의 거처로 비쳤다.

 

    거기 한 구석 어디서 한나절 졸고 나면 심신이 두루 때를 

    벗어 신선이 될듯도 했다.

    산 자와 죽은 자가 서로 말을 건네어 이승과 저승을 

    넘나들 수 있는 공간이 그 공동묘지였다는 말이다.

 

    나는 그곳에서 죽은 자를 조상한 것이 아니라

    죽은 자로부터 쓰디쓴 삶을 위로 받았다 하겠다.

 

    그 공동묘지 둘 중 하나에 있었지 싶다.

    작디 작은 채플이었다. 

    땅속에 묻히기 전에 다시 한번 이별하는 그 처소의 입구에 

    해독할 수 없는 짧은 스웨덴어 문장이 동판에 새겨져 붙어 

    있었다.

 

    통역을 불러 물어 보았다.

    "오늘은 나 내일은 너" 

    통역의 입에서 간단히 이 말이 떨어졌다.

 

    눈물이 왈칵 솟구쳤다. 

    사자가 우리에게 전하는 그 통절한 메시지가 어두운 

    내 눈을 찔렀던 것이다.

 

    이 글은 <샘이 깊은 물> 주간이었던 설호정 씨가 쓴 

    <삶 그리고 마무리> 라는 글의 한 부분입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읽는 순간, 심장이 딱 멎는 듯 했습니다.

    "맞아 !" 나도 모르게 입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먼 

    하늘을 바라보았습니다.

    왜 이 평범한 진리에 설호정 씨는 눈이 찔린듯했으며,  

    나는 심장이 멎는 듯 했을까..

 

    그것은 죽음을 나 자신의 일이라고 여기지 않고

    있었기 때문 이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죽는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죽음을 

    진정으로 자신의 일로 받아들이지 않고 살아왔기 때문

    이었습니다.

 

    우리는 대부분 죽음을 잊고 삽니다.

    다른 사람은 다 죽어도 나만은 죽지 않고 영원히 살듯이 

    살아갑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더라도 죽은 이들의 저 

    소중한 침묵의 가르침, '오늘은 나, 내일은 너' 라는 말 

    속에는 열심히 후회없는 삶을 살라는 교훈의 의미가 더 

    큽니다.

 

    '나만 죽는 줄 아느냐, 두고 보자, 너도 죽는다' 는 

    힐난의 의미보다는, 언젠가는 누구나 다 죽기 때문에 

    항상 죽음을 잊지 말고 하루 하루 열심히 살아가라는

    당부의 뜻이 담겨 있습니다.

 

    매일 매일의 삶에 충실할 때 죽음은 더 이상 죽음이 

    아닙니다. 오늘 하루 하루를 충만히 사는 것이야말로 

    죽음에 대한 가장 이상적인 준비입니다.

    죽음을 전제로 하지 않고 사는 생은 가짜 보석과 

    같습니다.

 

    어느 호스피스의 말에 의하면 사람이 죽어가면서

    마지막으로 하는 세 마디는 

    "그때 좀 참을걸" "그때 좀 베풀 걸" "그때 좀 

    재미있게 살걸" 이라고 합니다.

    임종하는 순간에 "사업에 좀더 많은 시간을 

    쏟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하고 후회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합니다.

 

    저는 지금 '만일 내가 죽음에 임박했다면

    무슨 생각을 할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아마 무엇을 생각하기 이전에 죽음의 두려움에서 쉽게 

    벗어나기조차 못할 것 같습니다.

 

   보고 싶은 사람을 보지 못하는 관계의 단절에서 

   오는 두려움, 영원한 소멸의 두려움을 극복하기 

   힘들 것 같습니다.

 

    문득 <미리 쓰는 유서>라는 글에서

    '지금껏 귀의(歸依)해 섬겨온 부처님이라 할지라도 

    그는 결국 타인이다.

    이 세상에 올 때도 혼자서 왔고, 갈 때도 나 혼자서 

    갈 수 밖에 없다' 라고 한 법정 스님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스님께서 당신의 죽음을 사색하며 부처님도 타인이라고 

    여기시는데, 저야 오죽하겠습니까.

 

    저는 다시 죽음을 앞두고 후회할 일이 무엇일까 생각해

    봅니다.

    먼저 '좀더 책을 많이 읽을 걸, 좀더 여행을 많이

    다닐 걸, 남한테 좀 더 많이 줄 걸' 하는 생각을

    하다가  피식 웃음을 터뜨립니다.

    아무래도 그런 생각은 진실과 거리가 멉니다.

    이번에는 '좋은 시를 좀더 열심히 쓸 걸' 하고 진지하게 

    생각해 봅니다.

    그러나 그 생각도 오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제가 시에 대해 그 정도로 절대적 가치를 두고 살았느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시는 삶을 위한 것이지 죽음을 위한 것은 아닙니다.

    다시 '좀 더 용서하고, 좀 더 용서 받을 걸'

    하고 생각해 봅니다.

    그러나 용서야말로 신의 몫이지 제 몫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인간인 제가 진정 용서하고 용서 받을 수 있을지

    의문이 듭니다.

    그렇다면 내가 무엇을 가장 후회할 것인가,

    다시 곰곰이 생각해 봅니다.

    아무래도 진정으로 감사하지 못하고 살아온 점이 

    후회될 것 같습니다.

 

    얼마 전, 여든일곱의 '힘없는 나이'인 아버지에게 

    말했습니다.

    "아버지, 죽음을 두려워하지 마세요.

    지금보다 더 늙고 병들 것이라고 비관하지 마세요.

    지금까지 그 누구보다도 건강하게 사신 것만해도 

    감사하다고 생각하세요.


    그렇게 말하고는 문득 놀랐습니다.

    그건 바로 저 자신을 향해 소리친 말이었습니다.

 

    아버지는 " 알았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하고 말씀

    하셨지만, 그 말씀은 "그래 너도 그렇게 생각해라." 하고

    저를 향해 하시는 말씀이었습니다.

    제가 진정 감사하며 살아간다면,

    진정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정호승 산문집 중에서 -



정호승 시인에 글을 "무단발췌"하였는데 괜찮은지 모르겠습니다. 저자께서 너그러이 봐주실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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