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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평생에 잊지 못할 두 번의 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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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joy
조회 2,569회 작성일 11-01-07 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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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명 남짓한 가족모임인 정월 초하루의 식사를 준비하자면, 우선 메뉴를 정하고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김치를 맛있게 담그는 일이다. 이제껏, 사먹는 김치는 위생상 더럽다는 이유로 김치만은 내 손으로 직접 담그겠다는 일념과 함께 이번에도 어김없이 밤을 새우며 설 김치를 장만했다. 담구어 놓은 김치를 며칠이 지나 맛보니, 마치 땅속에 묻어놓은 독에서 갓 퍼온 깊은 맛이 우러나는 김장 김치처럼 맛이 훌륭했다.

 

그런데 ~ 하니 톡 쏘는 맛의 김치를 먹는 순간 갑자기 내 기억 속에서 어렴풋이 지워져 가는 친구의 얼굴이 하나 떠올랐다. 중학교 일학년 짝궁이었던 17번 오?순 (정확한 이름이 기억나지 않지만 ) - 밝고 당당하고 바지런했던 그 아이가 반생이 흐른 지금 불현듯 생각나는 것은 아마도 내 잠재의식 속에 자리잡고 있었던 김치의 미각에서 오는 연상작용이 아닌가 싶다.

 

눈이 펑펑 쏟아지는 어느 겨울날 교정의 백송나무 밑에서, 그 아이는 방과 후 자기 집에 가자고 나를 졸랐다. 나는 그 아이를 쫒아 바로 학교 교문 앞에 있는 <복덕방> 이라는 간판이 걸린 납작하고 허름한 지붕 밑으로 들어섰다. 가게 뒤로는 방 한 칸에 부엌이 딸린 비좁은 장소가 눈에 들어왔고 그곳에서  4식구가 기거를 하고 있었다. 가끔 등록금을 기한 내에 내지 않아 교무실에 불려가는 일이  있었지만, 늘 빳빳하게 풀 먹인 교복의 하얀 칼라를 깔끔하게 차려 입고 다니는 그 아이로 보아서는 이렇게 어렵게 사는 줄은 꿈에도 몰랐다.

 

오?순은 말이 부엌이지, 방문하나 밀면 빤히 보이는 손바닥만한 부엌에서 차갑게 얼은 흰밥 덩어리를 양은 냄비에 넣고 물을 부어 연탄불 위에서 펄펄 끓이더니, 살얼음을 깨고 독에서 막 퍼온 김장 김치를 귀퉁이가 찌그러진 알루미늄 밥상에 올려가지고 들어왔다. 찬밥 덩어리를 끓여 내온 양푼에는 숫가락 2개가 꽂혀 있었고 김치가 달랑 전부였다. 미안한 이야기일지 모르지만 나는 이제껏 그런 밥상을 대한 적이 없었다. 김치는 반찬도 아니었고 더구나 어떻게 비위생적으로, 한 양푼에 서로의 숫가락을 담그며 같이 먹어대야 하는가? 우리 집은 식구끼리도, 먹던 숫가락을 한 그릇에 넣고 먹은 적이 없었다.

 

그런데 그날 머리를 맛대고 먹어본 뜨거운 물 말은 밥과, 손으로 척척 찢어 밥 위에 올려놓은 김치는 이제껏 먹었던 어

느 산해 진미와 비할 수 없는 너무나 환상적인 맛이었다. 17번 오?순- 지금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그 아이의

기세로 보아서는 평범한 삶을 살지는 않았을 것을 문득 그 친구가 보고 싶어진다. 김치 한 조각에서 우리의 빛 바랜

추억을 불러 낼 수 있었던 오?순의 힘 - 그것은 바로 비틀어지지 않은 우정이었다.

 

그 후 세월이 흘러 나는 남편과, 돐이 채 되지 않은 딸아이를 데리고 미국으로 오게 되고 외로운 이민사회에서 교회생활도 즐겁게 하며 친구도 많이 사귀며 바쁘게 지냈다. 처음으로 우리 소유의 새 차도 샀다. 그런데 하루는 남편의 친구부부가 연말의 휴가 동안 우리의 새 차를 길들일 겸, 세살된 두 딸들을 데리고 디즈니랜드를 가자고 제안을 했다. 서로가 알뜰하게 절약하며 살아갈 때이니 만큼 호텔에서 묵는 것은 생각도 못하고 자기의 누님이 디즈니랜드 근처에 살고 있으니 잠은 그 집에서 자고 점심은 샌드위치를 만들어 가서 하루 종일 디즈니랜드에서 놀고 돌아오기로 여행계획을 세웠다. 우리는 교통편을 제공하고 자기는 잠자리를 제공하겠다는 참으로 실속있는 여행이었다. 이틀 밤을 그 집에서 신세 질 것을 생각하여 나는 따로 선물을 준비했다.

 

도착해보니 친구의 누님은 정말 입이 벌어질 만한 궁전 같은 이층집에 살고 있었다. 그런데 그날 밤 나는 이 아름다운 집에서 내 생애에서 가장 춥고, 배고프고, 서러운 밤을 지세워야 했다. 그렇게도 고래 등 같은 큰 집에 살면서 동생 내외와 친구 내외가 먼 곳에서부터 누나를 만나러 왔다는데 아침에 떠나 햄버거로 점심을 먹고 6-7시간을 달려 그곳에 도착했기에 우리들은 허기가 졌고, 그때는 한국식당도 귀했던 시절이라 저녁 정도는 동생내외와 친구를 위해서 준비됐겠거니 생각을 했다.

 

지나가는 나그네도 굶겨 보내지 않고 머물다 가라 하는 것이 우리네들의 정서이거늘 하물며 저녁을 먹지 않았다고 하는데도 그들이 내놓은 것은 그로서리에서 막 집어가지고 온, 씻지도 않은 곱창 한 팩과 소금이 전부였다. 누님 부부는 바깥 날씨가 추운데 몸을 웅크리며 뒷 정원에 설치되 있는 멋진 바베큐 틀에 불을 지피고, 불이 무색할 정도의 작은 양의 곱창 위에 소금을 뿌리기만 하고 있었다. 집을 것도 없는 석쇠 위에서의 서로 부딪치는 젖가락 소리만 들리는 수치스럽고 비굴했던 그 날의 식사를 잊어버릴 수가 없다.  그 집은 그 흔한 김치도 라면도 없었는지  밥과 김치만 있더라도 햄버거로 점심을 때우고 온 우리에게는 너무나도 달고 단 식사였을텐데 

 

그날 밤, 아랫층의 빈방에서 이를 덜덜 떨며, 시린 이마와 빨갛게 된 코를 감싸 안고, 추워 떠는 어린 딸을 사이에 놓고 우리 부부는 서로 껴안고 잠을 자야만 했다.  오히려 야외의 텐트에서 자는 것이 더 포근했다. 아침에 일어나 살펴보니 방의 히터 나오는 배출구가 굳게 닫쳐있었다. 나는 그제야 왜 추운 겨울날 뒷마당에서 곱창을 굽도록 했는지 알게 되었다.  그들은 추운 겨울에도 난방비를 절약하기 위해 히터를 끄고 살았고, 밤이 되어 잠자러 안으로 들어갈 때까지 우리들을 바깥의 불 앞에 세워두었던 것이다. 먹을 수도 없는 애꿋은 곱창을 태워가면서 말이다. 그렇게 궁상을 떨고 살거라면 왜 감당도 못할 그런 큰 집에 사는지 불쌍한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최소한의 타인에 대한 배려- 예수의 정신까지는 아니더라도 나그네를 대접하는 마음은 우리들의 부모세대로 부터 물려받은 아름다운 정서가 아니었던가?  

 

그것이 이민 일 세대의 삶이라고 숨가쁘게 허리띠를 졸라매며 밤낮으로 돈만 벌어야 하는 이민 일 세대의 애환이었

다고 말하기에는 너무나 삭막한, 돈의 노예가 되어있는 현대인을 바라보며 서글펐던 마음을 잊을 수가 없다. 그날은. 내 생애 처음으로 추위와 배고픔에 떨었던 가장 긴 밤이었다.



댓글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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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nkey님의 댓글

donkey 작성일

늘 좋은 산내음 가득한 공기를 흠뻑 들이키는 듯한 산뜻함을 주는 joy 님의 글 신년초 1탄을  잘 읽었습니다. 정말 재밋고요.

첫번째 식사의 그 친구분의 이름은 무엇인지 사뭇 궁금하네요.

그리고 두번째 식사의 host 님들은 지금쯤은 더 베푸시는 분들로 변했으면 희망해 봅니다.

엣날 제가 어렷을때만해도 한국에서의 시골인심은 지나가는 사람을 재워주고 밥먹여주고 했습니다. (무전여행하면서 제가 직접 체험하였습니다.)  아직도 그런 인심이 중동지역에는 남아있다고들 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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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y님의 댓글

joy 작성일

물질의 풍요로움으로 보자면 예전 보다는 지금이,시골보다는 도시가 더 넘쳐나는데도 불구하고

마음은 더욱 닫혀있지요. 역시 산호세 시골 인심과 L.A.도시 인심은 다른가 봅니다. :)


여러분!

혹시 집에 손님이 오셔서 주무실 경우에는 반드시 heater vents를 열어 놓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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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지연님의 댓글

신지연 작성일

joy 님의 글을 읽으면서 그 옛날 맛보던 겨울 날 꽁꽁 언 땅 속 묻힌 항아리에서 꺼낸 살얼음 살짝 낀  김장 김치 생각이 나서 입안에 침이 고여 옵니다.  옛날 저희 집은 달랑 가족 6 식구임에도 불구하고  저희 친정 어머니 금 여사님은 왜 그렇게 김장에 목숨을 거셨는지 배추 150 포기식 김장을 하고는 다음날 내내 끙끙 앓으셨습니다. 


김장날이면 마당 가득 에베레스트 산처럼 쌓여 있던 배추의 모습과  집안 가득 배여있는 찝질한 양념 냄새와 모든 잔 심부름은 맏딸 이었던 제 몫이었기 때문에  저는 사실 김장 반대론자였었습니다.


시간이 흐르고 겨우내 땅 속 에 있던 시큼한 김치와 쫑쫑 박힌 무우들이 각종 모양새로 식탁에  오르면 아작 아작한 배추의 질감과 시큼하게 잘익은  그 맛에 < 바로 이맛이야 > 를  외치며 한겨울을 나곤 했었습니다.


150 포기씩 씩씩 용감하게 김장을 하시던 그 금여사님도 이제는 택배로 김치를 배달시켜 드시니 더이상 그 옛날 추억의 김장 김치는 더이상 맛 볼수가 없답니다.


그 많이 담근 김장 김치를 소비하기 하기 위해서  핑계삼아 동네 사람 불러다 김치전도 해먹고 삥 둘러 앉아 만두도 만들어 먹고, 한 솥 가득 국수를 삶아 김장 김치 송송 썰어 넣고 참기름 한방울 떨어뜨려 쓱쓱비벼 동네 친구들 다 불러 모으곤  했었는데 아까운 택배 김치는 더이상 동네 잔치를 허락하지  않습니다.


아마 제 어머님 금 여사님도  그 때 김장를  담근 것이 아니라 joy 님의 친구 오?순 씨 처럼  한 겨울 동안 친구들과의  나눔과 교제를 준비하신  것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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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y님의 댓글

joy 작성일

그날,13살배기 오?순이 꽁꽁 얼은 손으로 차려 내온 식탁은 자신이 가진 것중의 최선을 내놓았다는 것이고, 그러기에 아무것도 섞이지않은 그 순수함이 우정의 탑을 쌓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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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걸음님의 댓글

소걸음 작성일

다른 사람을 살리는 부요함은 물질의 풍요에 있지 않고, 마음에 있으니...풍요한 마음, 넉넉한 마음 갖자 말씀하시는 듯 합니다. 논문 쓰면서 신경이 바짝 곤두서 있는 제가, 올 상반기에 시험에 들지 않기 위해 새길 메시지인 것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