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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의 침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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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joy
조회 3,175회 작성일 10-11-05 1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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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불고 빠알간 감이 익기 시작하는 가을이 오면, 내 마음과 몸도 부산해지며 살얼음 같은 신경전이 시작된다. 한 여름의 나른하고 고요하기까지 했던 나의 정원에서 언뜻언뜻 바쁜 움직임의 동작이 포착되고, 갑자기 어두운 구름 같은 그림자가 드리웠다 사라지는 순간이 감지되는데, 그것은 이맘때면 찾아오는 가을의 불청객이 내 주위를 서성거리고 있기 때문이다.

 

제법 나무도 커지고 동네가 울창해 져서인지 뒷산에 사는 노루가 장엄한 관을 머리에 이고 무거운 듯 조심스레 비탈을 내려오는 모습을 가끔씩 목격하지만, 내 정원을 마치 제 집처럼 드나드는 얄미운 다람쥐로부터 궁뎅이에 하얀 털 방울이 달린 잿빛 털의 아기 토끼, 얼굴에 교만이 철철 넘치는 우아하면서도 세련된 자태의 검은 고양이, 가끔씩 들려 목을 축이고 떠나는 이름 모를 새들, 거기에 내가 제일 미워하는 까마귀까지. 나의 정원은 어느새 동물의 왕국이 되고 만다.

 

오늘 아침 우연히 내 시선이 머문 담장 위에, 누군가가 갉아먹다 남긴 주홍 빛 감이 가지런히 놓여있다. 첫 열매를 따기도 전에 감히 먼저 먹어 치우다니! 괘씸한 마음으로 눈을 들어보니 바람이 불지도 않는데 나무가 흔들거린다. 나뭇가지를 오르락 내리락 널뛰기를 하며 배불러 먹다 버린 나의 귀중한 임금님 진상품 짜리 감이 아까워 화가 머리 끝까지 치민다. 차라리 온통 하나를 먹고 증거를 인멸시키면 좋으련만…… 이것 저것 침 발라 놓고 담장 위에 보란 듯이 올려놓는 그 심뽀를 이해할 수가 없다.

 

나는 지난 2년간 나의 아끼는 감나무를 사수 하기 위해 다람쥐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별의 별 작전을 다 써보았다. 다람쥐 죽이는 약에서부터 시작하여 나무를 보호하는 망, 열매에 봉지 씌우기, 한번도 맞히지 못했던 딱총 쏘기, 심장마비 걸리라고 호스로 쏘아댄 차가운 물총, 소나기 작전까지. 그러나 왠걸? 물에 젖은 몸을 탁탁 여유롭게 두세 번 털고는 총총히 사라지곤 했다. 차라리 그 돈으로 감을 사먹는 것이 경제적으로 낫다는 것을 아는데도, 그들의 접근을 필사적으로 막으려는 나의 노력은 그 감나무가 나에게는 일종의 기다림의 상징이며 자부심이었기 때문이다.

 

아련한 기억 속에 남아있는 산골짝의 다람쥐 는 더 이상 도토리를 먹는 귀여운 아기 다람쥐가 아니라, 나의 밥그릇을 뺏어먹는 무서운 적으로 변해 있었다. 하기사, 다람쥐 양식을 모두 거둬다가 먹어 치우는 인간들 때문에 그들의 반격을 받는 것이 당연한 인과응보 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어느 산에는 이러한 문구가 써있는 것도 보았다. -도토리는 다람쥐의 양식입니다. 다람쥐가 먹도록 놓아둡시다-. 이런 저런 이유로 나는 결국 다람쥐 진멸을 포기하고 그들과 화친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몇 해 전 산불로 인하여, 먹을 것을 찾아서 내륙으로 들어온 까마귀들이 우리 동네로 대거 이동을 해왔다. 히치콕의 라는 영화에서 보았던 검은 새가 온통 거리를 뒤덮으면 아주 기분이 나쁘고 불길하기까지 했다. 지붕에다 벌레며 열매를 숨겨놓기도 하고 사람이 다가가면 꿈쩍도 안하고 오히려 잡아먹을 듯한 기세로 노려보는 까마귀가, 귀에 거슬리게 울어대던 그날 아침에 나는 내 사랑하는 친구의 죽음을 지켜보아야 했다.

 

까마귀는 convus corone 이라는 부류로 종류만도 40개가 되는데 윤기 나는 검은 털을 가진, 조류 가운데 가장 머리가 좋은 부류로 농작물,음식물 쓰레기 등 잡식성의 다양한 먹이를 먹을 만큼 적응력이 뛰어나 새이다. 호두를 길바닥에 두었다가 자동차가 지나가면서 부수면 그 알맹이를 먹을 정도로 영리한 새인 것이다.

 

그 영리한 까마귀가 어느 날 나의 감나무를 탐내기 시작했다. 동네에 과일나무가 많고 이 세상의 나무가 다 제 것이건만, 과일 열매가 땅에 듸굴듸굴 굴러 다니는 부잣집 과수원은 쳐다 보지도 않고 왜 하필이면 한 그루의 감나무만을 소지하고 있는 내 집 나무에만 사생결단 달라붙는지 마치 나봇의 포도원을 탐내던 아합 왕과 같이 야비하다.

 

살이 피둥피둥 쪄있는 빤지르르한 검은 까마귀 서너 마리가 나무에 앉으면 그 무게로 말미암아 가지들이 휘청거리며 튀어 오르는 텀블링처럼 요동이 심했다. 그들이 코를 박고 게걸스럽게 먹어 치우고 난 그 자리에는 항상 속이 말끔하게 비어있는 빨간 감 껍질만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까마귀는 아침 점심 저녁 세끼의 식사를 하기 위해 하루에 세 번 어김없이 나의 감나무를 찾았고, 그들이 훑고 간 자리에는 늘 전쟁터의 잔해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이 아름다운 가을에 또 다시 침입자로 인하여 불안해하고, 감나무를 사수하기 위한 나만의 의식(ritual)이 나의 정신을 지배하고 있음을 발견한다. 희한하게 그들은 정해진 시간에 방문했으므로 나는 외출을 했다가도 그 시간이 되면 부랴부랴 집으로 돌아왔던 것이다. 어느새 이것들이 너무 쉽게 나의 관심의 중심이 되어 있다는 것과, 그들에 의해 내 생활의 패턴이 컨트롤 당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문득, 가을의 침입자는 정원에 들어와 나의 양식을 노략질하는 다람쥐나 까마귀가 아니라, 온전한 열매를 추구했던 감나무에 대한 나의 애착과 분산된 마음이 영혼의 침입자였음을 깨닫는다.

 

감나무를 지키느라고 매달렸던 정신력의 소모, 의식(ritual)에 쏟아 부은 시간과 비용, 아무리 그 나무가 나에게 기다림의 상징이며 소생의 기쁨을 가져다 주었던 자부심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우선적으로 구하는 일에 장애가 된다면 나는 얼마든지 미련 없이 감나무의 달콤한 열매를 포기하겠노라..이렇게 스스로에게 타이르며 오늘도 하나님의 산을 향하여 힘찬 걸음을 내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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